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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40] 조선시대 최기의 명신 '강희맹 집터'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14 07:53:01
  • 수정 2024-04-10 22:3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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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강희맹(姜希孟, 1423~1483) 집터는 조선시대 초기의 명신(名臣)으로 잘 알려진 사숙재(私淑齋) 강희맹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현재 순화동 염천교 교차로 인근 라마다호텔 앞 통일로변에 1999년 서울특별시가 설치한 기념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 대부송(大夫松)으로 불리었던 소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희맹의 집터에는 연산군(燕山君)으로부터 정3품의 당상관 품작을 하사받은 대부송(大夫松)이 있었다고 한다.


강희맹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며, 이모부가 세종(世宗)이다.



강희맹은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로 벼슬을 시작했다. 1450년(세종 32) 예조좌랑에 이어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다.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됐다. 1463년(세조 9)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강희맹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됐고, 예조판서.형조판서를 지냈다. 1468년(예종 1) 남이(南怡)의 옥사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책봉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고, 지춘추관사로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했다. 이어 돈령부판사·우찬성 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강희맹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겸손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인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을 지녀 관인문학(官人文學)의 틀을 스스로 깨뜨린 면모도 있었다. 


문집으로는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와 일가의 시를 모아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稿)'가 있다. 이 밖에 서거정이 성조의 명을 받고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이 전한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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