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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39] 신라호텔 & 영빈관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1 23:19:38
  • 수정 2024-04-10 22: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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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신라호텔은 남산의 풍광과 녹음이 어우러진 곳에 위치한 서울의 대표적 호텔로,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에 소재하고 있다. 신라호텔이 위치한 자리는 대한제국기에 장충단이 조성돼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박문사(博文寺)가 있던 곳이다. 신라호텔은 삼성그룹이 1973년 정부로부터 장충동 영빈관(迎賓館)을 매입해 공사에 착수해 1979년 완공했다.


신라호텔은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호텔신라가 경영하는 관광호텔업체로 남산 중턱인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49에 위치한다. 본관은 지하 3층 지상 23층으로 박춘명(朴春鳴)과 일본 다이세이건축[大成建築]이 설계를 담당했다. 1974년 공사에 착공해 1979년에 준공한 신라호텔은, 대지면적 2만 9,900㎡, 건축면적 8,715㎡, 연면적 6만 1,545㎡의 규모의 호텔이다.


2층에서 내려다 본 신라호텔 1층 로비


신라호텔은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특급호텔로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어 빼어난 풍광과 조화를 이룬 호텔이다. 붉은 타일의 PC판으로 이루어진 객실부의 볼륨은 합리주의적 조형감을 보여주지만, 현관의 양감이 풍부한 기와지붕은 전통미를 표현한다. 두 방향으로 분리되는 로비 공간은 개방성을 특징으로 주변의 녹음을 실내로 끌어들이는데, 실내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한국적 정서가 짙다.


신라호텔이 위치한 장소는 대한제국기에 장충단(獎忠壇)이 있던 곳이며, 일제강점기에는 박문사(博文寺)가 있던 곳으로, 장충단은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과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의 제단(祭壇)으로 1900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됐다. 그러나 일제는 국권피탈 후 장충단을 없애고, 이 일대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를 세웠다. 



영빈관과 신라호텔 전경

일제는 박문사를 건립하면서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가져다 산문(山門)으로 세웠고, 소공동 롯데호텔 주차장 부근에 있던 석고전(石鼓殿)을 옮겨와 종루로 사용하기도 했다. 홍화문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석고전 건물은 광복 이후 창경궁으로 이전됐다가 철거됐다.


광복 후 박문사를 철거한 자리에 1967년 영빈관이 건립됐다. 영빈관은 정부가 운영하는 국빈 전용의 숙소였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1973년 민간에 매각됐다. 영빈관을 인수한 삼성그룹은 ㈜호텔신라를 설립하고, 1974년부터 신라호텔 본관 건설에 착수했다. 1979년에 신라호텔을 개장하면서 장충단 터와 영빈관은 신라호텔이 아우르게 되었다. 현재 신라호텔은 본관과 영빈관, 면세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호텔 내에 소재한 영빈관은 1967년 2월 국빈전용의 숙소로 준공된 한옥건물이다. 1973년 7월 삼성그룹이 영빈관을 인수한 후 지금은 호텔의 일부로서 주로 회의장과 연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빈관 자리는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가 있었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빈관은 1967년 2월 국빈 전용 숙소로 쓰기 위해 9만 2,400㎡의 대지 위에 준공된 한옥 건물로 연건평은 3,300㎡이었다. 건물의 조경을 위해 주변에 여러 그루의 관상수를 심어 경관을 조성했다. 준공 직후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첫 손님으로 다녀갔고, 그 뒤 한국을 방문하는 국빈급 인사들이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 그중에는 1972년 남북회담 당시 서울을 방문한 북한 측 대표들도 있었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영빈관과 신라호텔

팔각정과 신라호텔원래 영빈관은 195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로 이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6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다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영빈관은 1972년까지 국빈전용 숙소로 이용됐고, 1973년 7월 삼성그룹에 인수되었다. 삼성그룹은 1973년 2월 14일 그룹 내에 호텔사업부를 만들고, 1973년 5월 9일 주식회사 임페리얼을 설립했다. 1973년 7월 영빈관을 인수한 후 삼성그룹은 같은 해 11월 호텔 기공식을 갖고, 1979년 신라호텔을 개관했다.



모자상

신라호텔은 우리나라의 호텔 가운데 전통문화를 반영하고 로비공간을 한국화한 건물로 특징적인데, 신라호텔이 이처럼 우리 전통의 표현에 역점을 둔 것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영빈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신라호텔이 현관을 창호문살로 장식하고 로비 지붕에 청기와를 올린 것도 모두 영빈관의 정취를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알려진다. 현재 호텔의 일부가 된 이 건물은 영빈관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지고 회의장과 연회장 등으로 사용된다.




신라호텔 영빈관이 있던 장소는 일제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일본 사찰인 박문사(博文寺)가 있었던 자리로,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23회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 완공된 후 일제에 의해 성역화됐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군수물자 저장소로 지하창고가 이용되었고, 광복 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대신 봉안되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국군 전몰장병 합동위령소로도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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