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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33] 한국 소극장의 중심지였던 '세실극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1 00:05:53
  • 수정 2024-04-10 22: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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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세실극장은 1976년 대한성공회 대성당 부속건물에 개관한 소극장으로, 대한민국연극제를 1회부터 5회까지 개최한 소극장이다. 1970년대 불었던 소극장 운동의 중심지였다.


세실극장(세실劇場)은 1976년 4월 개관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건축물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극장이다. 특히 유명건축가인 여천 김중업(如泉 金重業, 1922~1988)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대한민국 연극제’가 세실극장에서 처음 개최되는 등 한국 연극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영국대사관에서 대한성공회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에 있다. 극장 세실을 만든 사람은 동아방송 라디오제작부장을 지낸 임석규씨이다. 세실이란 이름은 성공회 주교였던 세실 쿠퍼(Cecil Cooper)의 이름에서 따왔다. 개관한 지 1년이 된 1977년 한국연극협회에서 대관해 연극인회관으로 사용하면서 한국 연극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당시에는 드물던 300석 규모의 소극장에, 교통이 편리한 이로운 점이 있었다. 1977년부터 4년간 총 183편의 연극을 공연했고, ‘대한민국연극제’를 1회에서 5회까지 이곳에서 올렸다고 한다. 



최인훈의 '옛날옛적에', 채윤일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한국연극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이 여기에서 공연됐다. 그리고 최백호, 최성수, 전인권, 안치환, 정태춘, 박은옥, 강산에 등 그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던 가수들의 라이브 콘서트도 많이 공연됐다. 1980년대 들어 새로운 연극을 하던 소극장들이 대학로로 옮겨가면서 세실극장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이후 세실은 마당기획에서 인수해 운영되다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고, 건물임대주인 대한성공회가 극장을 직접 운영키로 하고, 가수 겸 국악인 장사익 콘서트를 기획한다. 하지만 흥행이 저조해 적자가 늘어나자 사무실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극단 로뎀 대표인 하상길씨가 유서 깊은 극장을 살리기 위해 제일화재의 지원을 받아 재개관했다. 1970년대 세실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에게 이 극장은 낭만이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1999년 로뎀에서 인수한 뒤 세실극장은 대폭적인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가 기존 300여 석의 객석을 232석으로 대폭 줄이는 등 관람환경을 대극장 수준으로 개선했다. 2010년 한화손해보험(주)에서 제일화재해상보험(주)를 인수함에 따라 ‘한화손보 세실극장’으로 명칭이 변경, 이후 2012년 3월 한화손해보험(주)와의 스폰서십이 만료돼 ‘세실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 각종 연극 및 공연이 펼쳐진 바 있다.



세실극장 지하에는 세실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실레스토랑은 1979년 만들어진 이래로 수많은 기자회견이 있었던 장소로, 정치인, 문인들, 연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세실레스토랑 이전에 ‘파랑섬’ 다방이 이곳에 있었다. 그 당시엔 주로 대학생들이 단골이었다. 그러다가 1979년 언론인 서인태씨가 친구들과 이곳을 인수하면서 세실레스토랑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열기가 일어나면서 민주화운동과 연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모임 장소, 기자회견장이 됐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인사들도 매주 2~3번씩 이곳을 찾아 모임을 가졌다. 1987년 6월 10일에는 국본소속 시전 스님과 소설가 유시춘 선생이 바로 옆 성공회서울대교구당 종탑 꼭대기에서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를 기념해 성공회성당 내부에는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지석이 세워졌다. 이후 2009년에 세실레스토랑이 문을 닫고 지금은 같은 자리에서 달개비 식당이 회의 전문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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