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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20] 경운궁 양이재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08 22:32:49
  • 수정 2024-04-10 22: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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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경운궁 양이재는 대화재로 불탔던 경운궁(덕수궁)을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건물로 1905년에 완공됐다. 대한제국 황족과 귀족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었고 현재는 대한성공회 주교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경운궁(慶運宮) 양이재(養怡齋)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건축물로 1905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의 옛 이름)을 중건하면서 지어졌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황족과 귀족자제들을 위한 근대 교육기관인 수학원(修學院)으로 사용됐고, 1920년대부터 대한성공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2006년 9월 등록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됐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구경하다가 우측 뒤편으로 가면 대한성공회 주교 집무실로 사용되는 경운궁 양이재를 볼 수 있다. 왜 궁궐건물이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되었을까? 경운궁 양이재는 1905년 처음 지어졌을 때만 해도 경운궁에 속했다. 그러다가 1912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가 현재 북쪽 수녀원 자리에 있었던 이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다. 



이후 1919년 덕수궁의 주인인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1920년 조선총독부가 덕수궁 궐내 전각들을 무단으로 매각했고, 이 시기에 경운궁 양이재의 대지와 건물을 대한성공회에 팔았다. 1927년부터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2006년 9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리모델링했다.


수학원 관제는 1906년 공포되어 1910년에 폐지되고, 이 기간 동안 양이재는 함희당과 함께 수학원의 교실로 사용됐다. 수학원은 원장(칙임관) 1인, 교관(주임관) 4인, 서기(판임관) 3인의 교직원이 운영했고, 학생 수는 20명을 넘지 않았다. 학기는 4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까지였고, 교과목은 수신.국어.한문.외국어.수학.역사.이과.음악.체조 등이었고, 수업시간은 매일 2~5시간 정도였다. 오늘날 중학교 수준의 소수정예 황실학교였다.



양이재 뒤편에 가보면 철거된 함희당의 흔적도 볼 수 있다. 두 건물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전통 교육기관인 서원건축의 기본 건축 형식에 따랐다. 함희당은 강당의 기능을 했고, 양이재는 학생들의 교실 역할을 했다. 전면에는 양이재를 두고 후면에 함희당을 배치했다. 각 건물 전면에 행각(대체로 복도형태의 건물이 이어진 것)을 설치하고 두 건물 사이에 복도 3칸을 연결시켜 이동을 편리하게 했다. 양이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이었고, 함희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었다. 1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한다. 


기온이 달라지는 사계절에 모두 이용할 수 있게 양이재는 중앙에 시원한 대청을 두고 그 양측에 겨울에 따뜻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온돌방을, 그리고 온돌방 바깥쪽에는 홍원과 맞닿아 있는 누마루를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 민가와 다르게 지붕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의 수평마루)와 내림마루(용마루의 양쪽 끝단에서 수직방향으로 내려오는 마루), 추녀마루(지붕 45도 방면 추녀 위 마루)에 용두(용머리)가 있어 황실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황실의 또 다른 교육기관으로는 덕수궁 내 위치한 준명당이 있다. 이곳은 고종황제의 딸인 덕혜옹주가 공부한 곳이다.


경운궁(慶運宮) 양이재(養怡齋)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건축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실 공사인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년 궁내에 세운 건물로, 경운궁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한 주요건물 11채만 따로 도면을 그렸는데, 양이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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