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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15] 종로구 가회동 한씨 가옥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06 13:21:08
  • 수정 2024-04-10 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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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씨 가옥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넓은 집터에 본채와 행랑대문채로 구성돼 있다. 복도를 두고, 유리창을 달고, 정원을 꾸민 것 등은 서양풍과 일본풍의 현대식 생활기능을 도입한 것이다. 이 집은 개화기 이후 개량주택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집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은 가회방(嘉會坊)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가회란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을 말한다. 가회방이란 조선시대 북부 10방(坊) 중의 하나이다. 서울을 동서남북의 5부로 나누고 그 밑에 다시 중부와 서부에 8방, 동부에 12방, 남북에 11방, 북부에 10방을 두었다. 



행정동인 가회동은 법정동인 가회동, 계동, 원서동, 재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동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잿골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수양대군 일파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등을 유인해 살해한다. 이때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고 피비린내가 진동해 마을 사람들이 집에 있던 재를 가져다가 길을 덮었다고 하여 잿골이라 부르게 됐다. 



계동이란 동명은 조선시대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생동이라 했다가 계생동(桂生洞)으로 바뀌었고, 이를 줄여서 계동이라 불렀다. 원서동은 창덕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다. 



가회동의 문화유적으로는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4호인 가회동 한씨 가옥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제8호인 서울 재동의 백송, 사적 제281호인 중앙고등학교 본관, 사적 제282호인 중앙고등학교 서관, 사적 제283호인 중앙고등학교 동관, 사적 제296호인 관상감 관천대, 서울문화재자료 제2호인 이준구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인 가회동 백인제 가옥 등이 있다.




가회동 한씨가옥은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嘉會洞産業銀行管理家)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초기 사이에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넓은 집터에 본채와 행랑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의 경우 사랑채 부분과 건넌방 부분이 복도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나뉜다. 사랑채 부분은 왼쪽에 현관과 홀이 있고, 서남쪽에 사랑 대청을 두어 정원을 전망할 수 있게 했다. 대청 왼쪽에는 사랑 온돌방을, 그 앞쪽에는 주인실을 두고 툇마루를 돌렸다. 현관 홀 뒤쪽에 있는 2칸의 온돌방은 객실로 쓰고 있으며, 복도를 통해 대청 대마루에 이른다. 



대청 대마루 오른쪽으로 안방이 있고, 그 위쪽으로 부엌을 두었다. 안방 뒤쪽에는 2칸 온돌의 골방이 달려 있고, 부엌 오른쪽으로 2칸의 마루가 있는데 찬마루로 쓰고 있다. 부엌 동쪽에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고, 건넌방 뒤쪽에는 2칸의 뒷방을 두어 툇마루로 연결하고 있다.


가회동 한씨 가옥은 서양풍과 일본풍의 현대식 생활기능을 도입해 건축한 평면식 한옥으로 개화기 이후 개량주택으로 가기까지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벽면의 화초장식, 온돌방의 전통적 초배장판과 이중창 등에 서화를 붙인 점, 정원의 구조 등은 매우 흥미롭다. 개량한옥은 일제강점기 때 전통 한옥의 유형적 성격을 유지한 채 대청에 유리문을 달거나 처마에 잇달아 함석 챙을 설치하는 등 새로운 건축재료를 사용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옥이 서양풍과 일본풍을 도입해 새로운 도시주택의 유형으로 진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사진-우성훈 기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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