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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11] 숭례문 현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06 07:51:38
  • 수정 2024-04-10 2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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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숭례문(崇禮門) 현판(懸板)은 조선시대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에 따라 관악산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세로로 쓰여 졌다. 2008년 숭례문 화재로 파손되어 이를 복원한 뒤 2009년 다시 공개됐다.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고,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이고,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했다. 숭례문은 1448년(세종 30)에 고쳐 지은 것으로,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1479년(성종 10)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 현판(懸板)은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제작됐다. 숭례문은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관악산(冠岳山)을 건너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관악산은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보면 화기(火氣)가 매우 강한 산이다. 또한 음양오행설(木-東, 金-西, 火-南, 水-北)에 의하면 남쪽은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례(禮) 또한 화기가 매우 강한 글자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불의 기운이 도성 안에 그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숭(崇)이라는 글자를 앞에 사용했는데, 숭(崇) 또한 불을 상징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불의 기운으로 불을 막을 수 있다고 해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 등에 정도전이 현판을 세로로 쓰도록 했고,  글씨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세종의 맏형)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어떤 기록에는 이후에 화재로 현판이 소실돼 공조판서 유진동(柳辰仝)이 다시 썼다고 하는 설도 있다. 


서울 동작구 지덕사(至德祠)의 소장 탁본자료를 발견해 복원을 진행했다. 글씨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세종의 맏형)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판을 세로로 쓰게 된 이유 또한 관악산의 화기가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로형상은 불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형상인 동시에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형상이기도 하므로 이렇게 하면 불의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숭례문 현판은 2008년 숭례문 화재사건으로 인해 추락하면서 손상을 입어 고궁박물관으로 이송됐다. 복원을 위한 숭례문 현판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했다. 현판의 글씨와 단청문양에 대한 문헌조사를 거쳐 보존처리 했고, 서울 동작구 지덕사(至德祠)의 소장 탁본자료를 발견해 복원을 진행했다. 복원재료로는 숭례문 화재 피해 때 수습된 부재와 복구용 기증소나무가 사용됐고, 작업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기능을 가진 장인) 오옥진(吳玉鎭)과 제48호 단청장(丹靑匠, 단청의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홍창원(洪昌源)이 참여했다. 숭례문 현판은 1년여의 복원과정을 거쳐 2009년 7월 일반에 공개됐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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