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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05] 목멱산봉수대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04 23:29:47
  • 수정 2024-04-10 2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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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에 보고하는 중앙봉수소로,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했다.


남산의 정상에 오르면 팔각정 옆에 봉수대가 있다. 남산의 봉수대는 1394년(태조 3)에 처음 만들어져 1895년(고종 32)까지 사용됐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봉수 제도는 국가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지방 기지에 알리는 동시에 해당지방의 주민에게 알려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화대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최종적으로 집결한 상황을 도성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현재 봉수대는 ‘남산 제모습찾기운동’의 하나로 남산에 있었던 5개소 중 1개소를 1993년에 복원한 것으로, 이 복원에는 1800년대에 한반도 지도를 여러 차례 제작한 김정호의 '청구도' 등 관련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터는 조선시대의 중앙봉수대인 남산의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곳이다. 목멱산봉수대는 조선 태조(太祖)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1394년(태조 3)에 처음 설치되어 갑오개혁으로 봉화가 폐지된 1895년(고종 32)까지 약 500년간 운영되었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해 5개소가 있었는데, 지금의 자리에 1개소를 복원하고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했다.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는 조선시대에 전국 각지의 경보를 병조(兵曹)에 취합해 보고하는 중앙봉수소의 역할을 수행한 경봉수(京烽燧)였다. 조선 태조(太祖)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1394년(태조 3)에 처음 설치되어 갑오개혁으로 봉화가 폐지된 1895년까지 운영됐다. 목멱산봉수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에 해당된다.


흔히 봉화로 알려진 봉수(烽燧)는 횃불과 연기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과거의 통신수단이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烽燧制)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나타나고 있어 오래 전부터 봉화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봉화가 국가의 통신수단으로서 제도적으로 운영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인 1149년(의종 3) 봉수의 횃불수를 규정하고, 봉수군(烽燧軍)에게 생활대책을 마련해주면서 감독책임자를 배치하게 한 사실이 문헌에 등장한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종(世宗) 때 봉수망 전반을 유기적으로 정비하는 봉수시설의 관리인원 등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남아 전한다.


목멱산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최종 도달하는 중앙봉수소로서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다. 동쪽 제1봉은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으로, 제2봉은 경상도.충청도 방면으로 통하게 했다. 제3봉과 제4봉은 평안도 및 황해도 방면의 육로와 해로를 각각 통하게 하고, 제5봉은 전라도와 충청도 방면의 해로와 연결되게 했다.


목멱산봉수대는 갑오개혁으로 봉수제가 폐지됨에 따라 1895년 폐지됐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 남산에 5개의 봉수대 터가 산 정상에 일렬로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그 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목멱산봉수대 터에는 산 정상부를 따라 도로가 나 있고 N서울타워가 들어서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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