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준 기자] 강우규(姜宇奎, 1885~1920)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돼 사형당한 인물이다. 강우규의사(姜宇奎義士) 항일의거(抗日義擧) 터는 1919년 9월 2일 강우규의사가 신임 조선총독 일행에게 폭탄을 던져 항일의거를 일으킨 곳이다.
강우규(姜宇奎, 1885~1920)는 본관이 진주(晉州)이고, 자는 찬구(燦九).호는 왈우(曰愚)로 1855년(철종 6) 6월 2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30세 때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사해,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됐고, 학교를 설립해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해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교육사업에 전력했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朴殷植).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해 조국에 돌아가 거사(擧事)할 것을 자원,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했다.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기로 계획하고, 1919년 9월 2일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 앞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무라다[村田信乃] 육군소장, 고무다[小牟田] 혼마치[本町, 현재의 명동] 경찰서장, 구보(久保) 만주철도 이사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후 숨어 지내던 강우규는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강우규의사(姜宇奎義士) 항일의거(抗日義擧) 터는 1919년 9월 2일 강우규의사가 신임 조선총독 무라다 일행에게 폭탄을 던져 항일의거를 일으킨 곳으로, 강우규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현재 구(舊) 서울역사 앞에 기념 표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