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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84] 동양척식(주)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 중 자결한 '나석주열사 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31 03:05:48
  • 수정 2024-04-10 21: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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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의사 의거 기념 터[박광준 기자] 나석주열사상(羅錫疇烈士像)은 나석주(羅錫疇, 1892~1926)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사단법인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가 1999년에 건립한 동상이다. 나석주 열사가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의거(義擧) 기념 터에 세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KEB하나은행 본점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상 근처에 1994년 세워진 ‘나석주의사 의거기념 터’ 표지석이 있다.


나석주열사의 상나석주열사상(羅錫疇烈士像)은 국권이 피탈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나석주(羅錫疇, 1892~1926)열사(烈士)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자리(현 KEB하나은행 본점)에 건립됐다. 이곳은 1926년 나석주열사가 일제강점기 토지수탈기관(土地收奪機關)으로 악명이 높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의거 터이다. 1994년에 이미 세워진 ‘나석주의사 의거기념 터’ 표지석 근처에 1999년 11월 사단법인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가 높이 2.3m의 나석주열사상을 건립했다.


1892년(고종 29)에 태어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이 있었던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으로, 1917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귀국해 항일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6인의 권총단’을 조직해 독립군 자금모집과 친일파 처단활동을 펼치다 1920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3년 중국에서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과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거쳐 1924년까지 중국군 부대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국 텐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해서 더욱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강구하던 차에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12월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는 12월 28일 오후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건너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으로 달려가 총격과 함께 또 폭탄 1개를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사

이어 나석주는 바로 옆의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株式會社)로 들어가 총격을 가하고 나왔는데, 출동한 일본의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자 경찰 7명을 죽인 뒤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하다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사망했다. 그는 의거 전날 언론사에 “본인은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위해 왜적의 관.사설 기관을 심판하려한다”면서 의거를 예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석주열사의 상 주변 사진나석주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가 일본 경찰과 대치 끝에 자결한 김상옥(金相玉, 1890~1923)과 함께 1920년대의 무장투쟁인 의열단식 항일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1962년에 이르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나석주열사상은 2002년 11월 2일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0-1-12호로 등록됐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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