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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79]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평생 힘을 쏟은 '외솔최현배선생기념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1-30 09:06:47
  • 수정 2024-04-10 11: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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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은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하는 등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평생 동안 힘을 쏟은 국어학자이며 국어운동가, 교육자이다. 


# 한국어를 위해 바친 인생


1894년에 태어난 최현배 선생은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에 일생을 바친 국어 학자이자 국어 운동가며 교육자였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나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면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에 평생을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1919년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고 일본 교토제국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에 와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941년에 연희전문학교에 다시 복직했지만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1945년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과 부총장, 학술원 부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학술원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1970년 작고 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중구에 있는 높이 9.75m의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는 1971년 3월에 착공해 7월에 제막식을 했다.


# 최현배 선생의 업적


최현배 선생은 우리말과 글의 올바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광복 후 편수국장이 되어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때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작성하고 필요한 경우에 한자를 괄호 안에 넣도록 했다. 그리고 가로쓰기를 도입했는데, 현재 한국 출판물의 기본 틀인 한글 전용 표기와 가로쓰기는 최현배 선생에게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했고 '큰사전' 발간에도 많은 힘을 쏟았는데, '큰사전'은 한국 최초로 표준말을 지정해 한글맞춤법에 따라 편찬한 사전이다. 이 외에도 '한글갈' '우리말본' '나라사랑의 길' '한글의 바른길' 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 조선어학회 사건이란?


1921년 12월에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가 창립돼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한국 민족의 정신과 사상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관련 인물들이 검거되어 재판에 넘겨지는 등 탄압을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최현배 선생 등 많은 이들이 감옥에 수감됐다.

상세정보


# 최현배 선생



외솔최현배선생기념비(외솔崔鉉培先生記念碑)는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한글의 과학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를 기리기 위해 1971년 ‘최현배선생기념비건립위원회’가 남산공원 장충자락에 건립했다.


부지면적 40.32㎡에 높이 9.75m의 화강석으로 만든 기념비 가운데에는 동(銅)으로 부조(斧藻)한 최현배선생의 흉상(胸像)이 붙어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그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에 쓴 '임'이라는 시와 모기윤이 짓고 고동주가 글씨를 쓴‘외솔찬가’가 새겨져있다.


1894년(고종 31)에 경남 울산에서 출생한 최현배는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이고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최현배는 1915년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 1876~1914)에게 한글을 배운 뒤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한글연구와 한글사랑운동을 했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이어 192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교육학과 국어운동에 관련된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한글학회의 이사장직을 맡는 등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했다. 1941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휘말려 1945년 해방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출옥해 문교부(文敎部)에서 1945년, 1951년 각각 3년간 두 차례 편수국장을 지내면서 교과서편찬을 지도했다. 이후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돌아와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에 퇴임했다.


최현배는 학술원 부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글연구에 일생을 바쳐 말본의 체계를 확립했고 한글전용운동에 힘썼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單章)을 수여받고 1970년 사후에 국민훈장(國民勳章) 무궁화장(無窮花章)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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