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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83] 남대문이 숭례문이 된 유래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1-30 18:22:46
  • 수정 2024-04-10 21: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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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서 사대문 중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남대문(南大門)으로도 불렸다. 숭례문의 현판은 가로로 쓰인 대부분의 궁궐 현판들과 달리 종서(縱書)로 쓰고 세로로 세워져 있는데 이는 풍수(風水)를 중요시한 옛 선조들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행한 것으로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조선 개국 초기인 1398년 태조는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성곽에 네 개의 큰 문을 세웠다.



도성(都城) 사대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인 정도전(鄭道傳)으로 전해진다. 그는 유교(儒敎)의 오덕(五德)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방위에 맞도록 배정해 동쪽은 흥인문(興仁門, 현 동대문),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홍지문(弘智門)이라 했다. 각 문에는 현판(懸板)을 써서 달았는데 대부분의 궁궐 현판이 가로로 쓰인 것과는 달리, 숭례문 현판은 세로쓰기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는 전통사상인 풍수(風水)와 관련이 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면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이 화기(火氣)가 지나치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서울의 화기가 관악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악산은 산세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해서 예부터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으로 불렸는데, 풍수가들은 그 기운으로 인해 서울의 화기가 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경복궁에 잦은 화재가 일어나자, 태조는 경복궁이 관악산과 마주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궁궐의 방향을 약간 틀어 앉혔다. 그리고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관악산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또 문의 현판은 종서(縱書, 세로쓰기)로 쓰고 세로로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숭례문이다.


원래 숭례문은 인의예지 중,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지만 오행으로 볼 때 예는 불[火]에 해당한다. 여기에 높인다는 뜻을 가진 숭(崇)을 함께 쓰고 수직으로 현판을 만들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만든 것이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서체를 자랑하는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太宗)의 큰아들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숭례문은 몇 차례 수리를 거치긴 했으나, 임진왜란 등 크고 작은 변란(變亂)에도 보존됐다.


그런데 2008년 2월 화재가 발생하면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됐다. 이후 숭례문은 약 5년 3개월간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통해 복구됐고 2013년 5월 복구 기념식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때 잘려버린 좌우측 성곽을 복구하는 등 조선시대 당시 모습에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리기도 하는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됐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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