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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77] 근대무용의 선각자 조택원을 기리기 위한 '조택원춤비'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1-29 23:38:02
  • 수정 2024-04-10 1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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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앞에 설치된 조택원춤비/사진-우성훈 기자[우성훈 기자] 조택원춤비(趙澤元춤碑)는 조택원선생춤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선각자이자 신무용의 길을 열어 '만종' '춘향전' 등의 명작품을 남긴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을 기리기 위해 1996년 국립국장 안에 설립한 비석이다.


조택원춤비(趙澤元춤碑)는 1996년 3월 조택원선생춤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선각자이자 신무용의 길을 열어 '만종' '춘향전' 등의 명작품을 남긴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을 기리기 위해 국립국장 안에 설립한 비석이다.


조택원선생춤비건립추진위원회는 1992년 춤의 해를 앞두고 신무용의 선구자인 조택원의 업적을 기리는 춤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남에 따라 1991년 10월 발족됐다. 그간 문학비, 노래비는 있었지만 춤 관련 추모비는 하나도 없어 1992년 춤의 해에 춤비를 건립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으나, 무용계 일부에서는 조택원의 일제 강점기 활동을 문제 삼아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여러 논의가 오고 간 뒤 1996년 3월 21일 조택원춤비 제막식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조택원춤비는 무용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국내 최초의 비석으로, 국내외 무용가들이 모금한 비용으로 세워졌다. 최기원(崔起源) 홍익대 교수가 높이 3.5m에 춤을 추고 있는 조택원의 모습을 조각했으며 글씨는 김응현이 썼다.


조택원은 1907년(광무 11) 함경남도 함흥의 명망가에서 출생했다. 휘문고보를 다니면서 정구(庭球)선수로 활동했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에서 수학했다. 192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박세면(朴洗冕)을 통해 러시아 민속무용을 접했고 토월회(土月會)에서 춤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1927년 서울에서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발표회를 관람한 뒤 무용계에 입문했다. 이시이의 제자가 되어 일본으로 가서 그에게 무용을 사사하면서 이시이바쿠[石井漠]무용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에는 일본에서 '어떤 움직임의 매혹'이라는 솔로 공연을 했다.


자료사진


1932년 귀국한 그는 경성보육학교에 교수로 부임해 조택원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33년 경성공회당에서 첫 번째 신무용 공연을 열어 호평을 받았고, 이후 한국의 춤을 현대적인 무용예술로 재창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400여 회의 순회공연을 열었고, 1938년 일본 동경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한 공연은 일본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조택원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52년까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활동을 펼쳤고, 현대무용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aint Denis, 1879~1968)의 후원을 받았다. 1953년에는 유네스코 주최로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회를 가진 뒤 6개월가량 프랑스에 머물면서 공연했다. 그의 춤은 여성적인 섬세함과 특유의 서정성을 띄며 밝은 분위기로 관객들과 교감했다.



1960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한국문화단체 총연합회(예총) 최고위원에 취임했고, 1965년 예총 고문.무용협회 고문 등을 역임했고, 1973년 예총 상임고문, 1974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됐다. 1976년 사망했다.


수상경력으로는 한국무용협회 공로상(1964), 서울특별시문화상(1966), 예술원 공로상(1974)을 받았고, 197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을 받았다.


작품에는 무용시(舞踊詩) '부여회상곡(扶餘回想曲)' '학(鶴)' '만종(晩鐘)' 등이 있고, 무용극 '춘향전조곡(春香傳組曲)' '가사호접(袈裟胡蝶)' 등이 있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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