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71]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이 호텔을 건립한 '손탁호텔 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1-28 11:46:00
  • 수정 2024-04-10 11:03:11

기사수정

손탁호텔 전경[이승준 기자]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이 호텔을 건립한 '손탁호텔'은 ‘손탁빈관’이라고도 한다. 손탁(Sontag,A.1854∼1925)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K.)를 따라 내한해 25년간 한국에서 생활했다.


개항 초기 한국은 대외교섭상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손탁은 영.독.프.러 등 각국어에 능통했을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했다. 이에 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민비(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정책을 수립, 반청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돼 조선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했다. 즉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1898년 3월 16일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한 것이다.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영업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객실 5개의 양관은 호텔영업으로는 너무 협소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의 대외관계가 점차 다변화되고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욱이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전용호텔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에 정부는 1902년 10월,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영빈관을 경영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었다.


거액의 내탕금으로 신축했기에 사실상 한국정부 직영 ‘영빈관호텔’인 셈이였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됐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됐다. 손탁호텔은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가 되었다.


# 얽힌 이야기/정동구락부의 배일운동



이노우에가 사실상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1894년 12월 17일 직후 조선의 개화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배일운동이 시작됐다.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Chŏngdong Club)’라는 정치단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정동구락부는 일본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국왕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출범했다.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들은 ‘정동파’로 불리기도 했고, 미국측으로부터는 ‘미국파’ ‘친미파’ 또는 ‘존왕파’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배일운동이 주로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구미파’ ‘노미파’로도 불렸다.


정동구락부의 구성원은 크게 친미파와 친러파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가 주로 미국에 유학하거나 미국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러시아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친미파로는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 이상재, 정경원, 윤웅렬, 윤치호, 이윤용, 민상호, 현흥택 등이 있다. 친러파는 이범진, 민영환, 이학균, 김홍륙 등이다.


이들 정동구락부와 서울주재 서양인 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외교관구락부가 자연스럽게 어울린 장소가 손탁의 사저였다. 손탁은 고종에게 하사받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배일의식을 품고있던 조선의 정치인들과 서양의 외교관들 간에 친목을 도모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규합되기를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손탁의 시도는 성공했는데, 본격적인 호텔 업무가 시작되지도 않은 이때부터 이미 손탁 사저는 정동구락부의 근거지가 되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