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5] 연합 의병 지휘부인 ‘호남창의회맹소’ 결성한 '기삼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9 06:34:15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기삼연, 1851 ~1908, 독립장 (1962)


비록 무기가 정예하지 못하다 하나, 맹자의 말과 같이 덕이 있으면 몽둥이를 가지고도 진나라와 초나라의 갑옷 입은 군사를 매칠 수 있으니,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잃었다 하지 말라. 뭇 사람의 애국심이 성(城)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선생의 창의 격서문(檄書文) 중에서(1907. 9) -


#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


기삼연(奇參衍, 1851 ~ 1908) 선생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린 시절 당대의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기정진은 이항로와 함께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지키려는 데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외세 침략이라는 당시의 민족적 위기에 당면하여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데까지 발전한 성리학적 민족주의요, 고전적 민족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생은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널리 학문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교 경전 이외에도 도교, 불교의 경전과 패관, 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특히 병서도 읽고 연구하는 한편, 실제 여러 가지 병법을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훗날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군사들을 조련할 때, 주위 사람들이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저렇게 익혔을까”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의병장으로서의 면목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진군


선생은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였지만, 과장(科場)의 문란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895년 8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해 10월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자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생도 1896년 3월 기우만, 고광순 등과 함께 광주에서 거의하여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하여 갔다. 기우만이 광주향교에서 노사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거의를 천명하자 선생은 장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광주로 진군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기우만의 의병부대와 합세한 뒤 스스로 군무를 자원하였다. 이즈음 각 고을에서도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동참함에 따라 기세를 크게 떨쳤다.


호남창의동맹비그러나 같은 해 4월 진주의 노응규 의병부대를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가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고, 또 학부대신을 역임한 신기선이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파견되어 의병부대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기우만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의병부대의 해산에 극력 반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敵)의 협박을 받은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야. 이 군사가 한번 파(罷)하면 우리 모두는 왜놈이 될 뿐이다.”


그 뒤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중, 의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주에서 서울의 평리원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평리원장 이용태의 배려로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 연합 의병 지휘부인 ‘호남창의회맹소’ 결성


이후 조국의 운명은 더욱 기울어져 갔다. 특히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에 이어 2월 23일에는 전쟁에 필요한 정치적, 군사적 지점을 제공한다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었다. 이어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지면서 외교권과 재정권도 서서히 장악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의 준(準)식민지 상태가 되어갔다.


호남창의회맹소 편제정치, 군사적 침략과 더불어 일제는 일본인 관민들을 동원하여 경제 침탈에도 힘썼다. 특히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은 일제의 정치·군사적 후원 아래 토지를 점탈하고, 상권을 장악하면서 미곡을 비롯한 한국의 재화를 일본으로 반출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한국 민중의 항일의식을 고조시켜 자발적인 의병운동 참여를 가져 왔다. 더구나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됨에 따라 높은 전투역량을 지닌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이며 전민족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하여 갔고, 의병부대의 전투력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선생 또한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일어났다. 즉 1907년 음력 9월 영광 수연산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연합 의병 지휘부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어 항전준비를 완료하였다.


이처럼 편제를 완료함과 동시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항쟁을 촉구하면서 병사 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갔다.


선생의 서한(1895)# 각 의병장 중심으로 편제된 부대, 맹활약 펼쳐


선생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는 각 의병장 중심으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뒤, 각지로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 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였다. 그런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좀처럼 의병부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거의 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0월 29일 고창 문수사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 받아 영광 법성포로 나아갔다. 그것은 법성포에는 조기어장과 세곡미의 운송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일본인들을 위한 경찰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등도 갖추어진 곳이었다. 따라서 선생의 호남창의회맹소는 이곳을 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일제 침략 세력을 응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12월 7일 선생을 비롯하여 통령 김용구, 선봉장 김태원 등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부대는 영광 법성포를 공격하여 그곳을 탈환하였다. 그런 다음 순사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를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그럼으로써 일제 침략세력에 대해 철퇴를 가한 것이다. 


선생의 순국비법성포 공격 직후 선생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게 되었다. 즉 선생이 영도하는 본대는 장성과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고창으로, 선봉장 김태원이 인솔하는 부대는 나주, 함평, 광주로 이동하여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이 영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 토벌대는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에 도착하였다. 그것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그 해 겨울을 이곳에서 보낼 생각으로 옮겨 온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가 금성에 도착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중, 담양 주둔 일본 군경이 습격해 왔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3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때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조차 없었다. 때문에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깔려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한다.


기삼연 전령# 일본군에 의해 피살, 58세의 일기로 순국


담양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곧바로 순창의 복흥산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그것은 그동안의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일 혹한이 계속되어 더 이상 항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음력 설날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귀향하여 과세(過歲)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의병들에게 일시 해산을 선언하였다. 의병들을 각기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도록 한 것이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뒤 선생은 그 부근에 살던 기구연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설날 아침 피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선생의 피체 소식을 접한 선봉장 김태원은 장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급히 출동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에 이르렀으나, 이미 일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리 방도가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일본군에 피체되어 담양을 거쳐 곧바로 광주로 호송된 선생은 다음날인 1908년 음력 1월 2일(양력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는 선생을 추종하는 의병부대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가 재판도 없이 서둘러 학살한 때문이었다.


용오정사 경의당 전경일찍이 선생은 거의를 앞두고 어느 날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 꿈을 붉은 해로 상징되는 일제를 소탕할 소임을 스스로 맡은 것으로 해석하고 늘 이를 자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 꿈이 무산되고 말았으니, 선생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구만이 그 날의 안타까움을 대변하고 있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해를 삼킨 전년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呑日曾年夢亦虛)


그러나 선생의 순국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의 순국이 자극제가 되어 호남의병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과 같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던 수하의 김준, 김용구, 전수용,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은 물론, 안규홍, 강무경, 양진여 등 평민 의병장들이 나타나 이후 호남을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갔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