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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62] 효민공 이경직 묘역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6 09:52:45
  • 수정 2023-12-06 1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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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105호 효민공 이경직 묘역-유형문화재 제106호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 효민공 이경직 묘역

유형문화재 제105호


효민공 이경직 묘역(孝敏公 李景稷 墓域)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이경직(1577∼1640)의 묘역이다. 1997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05호 이경직신도비(李景稷神道碑)로 지정됐다가, 2008년 10월 3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이경직신도비(李景稷神道碑)는 조선 중기 문신 이경직(1577∼1640)의 신도비이다. 이경직은 전주이씨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으로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으로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효민공 이경직은 선조34년(160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는 등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승문원에 소속됐다가 광해군때 승정원.시강원.춘추관.홍문관.병조 등에서 봉직했고, 광해군 9년(1617) 여름 회답사(回答使) 오윤겸(吳允謙)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철산군(鐵山郡) 가도에 군대를 주둔하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곳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는데,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


1623년 인조반정후 의주부윤이 돼 선정을 베풀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 때 전라도절도사로서 왕을 호종했고, 그 뒤 수원부사와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1626년 다시 상경해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으로 비변사 제조를 겸했다.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使)로 활약했고 이후 호조참판.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경직 신도비/사진-문화재청모친상을 마친 뒤 1634년 도승지에 제수되나 다시 부친상을 당했고 1636년 다시 호군(護軍)에 제수돼 비변사 당상관을 겸했다. 그 해 12월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의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뒤따라갔다. 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있어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활약했고 도승지가 됐다.


1637년 봄 인조가 서울로 환궁하자 호조판서로 승진되고 다시 도승지에 서용됐고,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1639년 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돼 전후복구에 힘썼는데, 병으로 1640년 7월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신도비는 1668년 3월에 세워졌고 현재 비각(碑閣)에 보호돼 있다.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었다. 대좌 윗면에 연꽃잎을 새기고 앞면.뒷면에 각각 귀면(鬼面)과 비운(飛雲)을 새겼다. 비문은 친우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지었고 셋째 아들 형조판서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고 상단의 ‘贈右議政行戶曹判書諡孝敏李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도 이정영이 썼다. 


비문 말미에 새겨진 이정영 추기(追記)에는 김류 사망 이후 이경직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진 사실과 큰형 이장영(李長英)과 작은형 이기영(李起英) 자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 왼편의 산자락에는 위로부터 부친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묘, 이경직의 묘, 아들 상주목사 이장영의 묘가 차례로 위치한다.


#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유형문화재 제106호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사진-문화재청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 李氏 寧海君派 墓域)은 조선 15세기의 종친 영해군 일가의 묘역과 석물이 소재해 있다. 영춘군 이인의 신도비 등이 있다. 1997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06호 이인신도비(李仁神道碑)로 지정됐다가, 2008년 10월 3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영춘군 이인은 세종의 아홉 번째 지자인 영해군 이당의 아들이다. 1465년 출생으로 자는 자정이고, 어머니는 좌찬성에 추증된 신윤동의 딸이다. 어려서 외할머니 이씨의 손에 자랐고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열살 때 정의대부의 군에 봉해졌고, 그 뒤 사옹원 제조를 지냈으며 숭헌대부에 올랐다.


1506년 큰아들 완천부정 이기의 사건에 연좌돼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했는데, 그는 남해에 정배됐다. 수개월 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됐고 정국원종공신에 올랐다.1507년 4월 27일 사망했고, 그 해 8월 임신일에 도봉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목성이다.


사진-문화재청비는 1509년 9월에 건립된 것으로 상하 2단의 받침돌 위에 대좌를 얹고 그 위에 백일석으로 만든 비신과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대좌에는 연꽃잎 무늬와 안상을 새겼고,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을 비대칭적으로 새긴 점이 특이하다. 16세기 초기를 대표하는 석비로서 임당정공신도비 등 17세기 석비의 선례가 된다. 비문은 큰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이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 김희수가 썼다. 머리전서도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현지 안내문에는 ‘이곳에는 세종의 아홉째 아들인 영해군 이담을 비롯한 그의 장인과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 영해군은 세종과 후궁 신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 묘역군에는 크게 동쪽 능선에 영해군을 비롯하여 장인 신찬성공 윤동, 차남 김안도정 의, 손자 완천군 희와 강녕군 기, 종손 부원정 이 등의 묘역과 묘주 미상의 묘역이 두루 남아 있다. 영춘군 이인의 신도비는 1509년(중종 4)에 건립되었는데, 비문 중에 있는 ’도봉‘, ’노원‘ 등의 지명은 금석문에 나타난 최초의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가치를 더하고 있다. 검티중추부사 남곤이 비문을 지었고, 해서체의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승정원주서 김희수가 글씨를 썼다. 이들 묘역은 왕손 묘역의 묘제와 석물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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