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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9]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 ‘독립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4 14: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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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독립문 앞면

독립문 뒷면

[박광준 기자] 독립문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으로,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사신을 영접해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했다. 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 건립을 발의했다.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했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 문의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 다만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벽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했고, 조선인 목수가 시공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공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은 화강석 쌓기로 건립했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고,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함께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이전의 흔적인 서울 영은문 주초 2개(사적, 1963년 지정)가 서 있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했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고 해 공사비 4000원을 경성부에 위탁해 크게 수리하기도 했다. 당시에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로 강조한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했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가로.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영은문 주초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조선시대 객관이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영은문의 초석으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영은문의 주춧돌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맞았던 객관(客館)으로, 1407년(태종 7)에 처음 건립되어 ‘모화루’로 불렸다. 그 뒤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고쳐 불리고는 그 앞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1537년(중종 32)에 홍살문을 대신해 보다 격식을 갖춘 영은문을 건립했다. 처음에는 문의 이름을 ‘영조(迎詔)’라고 불렀지만, 1606년(선조 39)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주장에 따라 ‘영은’으로 바뀌었다. 다만 현재 전하는 서울의 고지도에는 ‘연주문(延柱門)’, ‘연은문(延恩門)’ 등으로도 기록돼 있다. 그 뒤 1896년(건양 1)에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거론되어 헐렸는데, 뒤쪽에 새로 독립문(獨立門)이 건립되면서 주춧돌만 남게 됐다. 1934년에는 남쪽으로 약간 옮겨 졌고, 1979년에는 성산대로와 금화터널을 개설하면서, 독립문과 함께 서북쪽으로 약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옮겨 세웠다.



'중종실록' 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2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의 문으로 건립했는데, 지붕에는 푸른색 기와가 덮였다고 전한다. 철거되기 이전에 찍은 사진에도, 2기의 긴 주춧돌 위에 두리 기둥을 올리고, 기둥 머리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얹은 뒤 평방 위에 공포(栱包) 6구(具)를 결구했고, 공포 위에 겹처마의 우진각 지붕을 놓은 모습이다. 이와 함께 지붕의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발랐는데, 그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를 놓았고, 우진각 지붕의 추녀마루에도 잡상을 얹었다. 또한 양쪽 기둥에는 꽃 무늬를 연이어 새긴 낙양을 달고서 그 가운데 부분에 편액(扁額)을 달았다.


현재 남아 있는 2기의 주춧돌은 2단의 받침돌 위에 긴 기둥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곧 네모난 아래바닥돌 위에 있는 네모난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2구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의 긴 기둥은 단면 4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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