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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3]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外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1-30 06: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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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61호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유형문화재 제61호 수죽 정공 신도비-유형문화재 제62호-유형문화재 제63호 제곡 정공 신도비

[박광준 기자] #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유형문화재 제61호


임당정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 鄭氏 林塘公派 墓域)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으로, 198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됐다.


임당공파 묘역에는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임당 정유길(1515∼1588)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임당정공신도비/사진-문화재청정유길은 중종 33년(1538) 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언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두로 거쳐 선조 18년(1585)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했고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처리했다. 또한 시와 글짓기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해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받침돌 어깨부분에 새겨진 연꽃모양과 머리돌의 쌍룡무늬 조각이 매우 정교하다. 인조 24년(164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외손자인 김상헌이 짓고, 글씨는 오원이 썼다.


# 수죽 정공 신도비

유형문화재 제62호


수죽정공신도비 수죽 정공 신도비(水竹 鄭公 神道碑)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창연의 신도비이다. 효종6년(1655년)에 건립, 현재 동래 정씨(東萊 鄭氏) 임당공(林塘公) 묘역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정창연의 부친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신도비(1646년)와 아들 제곡(濟谷) 정광성(鄭廣成)의 신도비(1657년)가 함께 세워져 있어 일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비는 화강암제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한 덩어리의 백일석으로 만들어 얹었다. 대좌에 새긴 기린과 쌍룡을 새긴 이수의 조각이 우수한데, 모두 임당 정공 신도비를 따랐다. 비문은 아들 정광성의 친우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지었고, 글씨는우의정 심지원이 썼고, "左議政鄭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이조참판을 지낸 여이징이 썼다. 비문에는 고조부 정난종(鄭蘭宗), 조부 정광필(鄭光弼), 부친 정유길 등 조상들의 약력과 선조.광해군.인조 때에 봉사했던 정창언의 행력과 인품이 기록되고 있으며 말미에 명문(銘文)이 새겨있다.


# 제곡 정공 신도비

유형문화재 제63호


제곡 정공 신도비(濟谷 鄭公 神道碑)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광성(鄭廣成, 1576년 ∼ 1654년)의 신도비로, 효종 8년(1657년) 5월 동래 정씨(東萊 鄭氏) 임당공(林塘公) 묘역 아래쪽에 건립됐다. 이곳은 정광성의 조부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신도비와 부친 수죽(水竹) 정창연의 신도비가 함께 세워져 있어 일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1984년 11월 3일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됐다. 


제곡 정공 신도비정광성은 자가 수백(壽伯), 호가 제곡(濟谷)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조부에게 글을 배웠는데, 12살 때 마마를 앓아 집안에 들어앉아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어 그 대부분을 기억했다고 한다. 1601년 진사가 됐고 1603년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소속됐다. 이듬해 천거돼 예문관 검열.대교가 됐다. 1605년 홍문관 정자, 예문관 봉교.전적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지냈고, 이어 병조좌랑.정언.수찬.교리 등을 번갈아 지냈다. 선조 41년(1608년) 임금이 승하했을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고, 암행어사가 되어 강원도에서 활동했다. 그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등과 함께 호당(湖堂, 독서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함으로써 조부와 부친 이래로 삼대가 호당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광해군 1년(1609년) 이조 낭관을 거쳐 헌납.전한.사성.사간.응교.직제학 등을 지냈다.


1613년 정온(鄭蘊)이란 선비가 영창대군의 작위를 환원시키고 대군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청하자 광해군이 크게 노한 나머지 장차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부친 정창연이 차자(箚子)를 올려 정온을 사형에서 구제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반대편에서 부친을 비방하는 일이 있자 이후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또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부친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 언관(言官)이 귀양보낼 것을 청하자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제곡 정공 신도비 비문1623년 인조반정 이후 호조참판.병조참판.이조참판.예조참판.강원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도승지.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한 뒤 한동안 은거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즉위해 형조판서를 제수했으나 사직하고 지돈녕부사로 체직(遞職)돼 도성 남쪽의 정사(亭舍)에서 지내던 중 효종 5년(165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4월 22일에 79세 나이로 사망했다.


비는 화강암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한 덩어리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들어 얹었다. 비의 형식은 부친의 수죽정공신도비(水竹鄭公神道碑)를 따랐는데, 조각의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비문은 맏아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부탁으로 영돈녕부사를 지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짓고 썼는데 글씨는 한석봉(韓石峯) 풍을 따랐다. "知敦寧府事鄭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이경석의 조카 의정부 사인(舍人)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비문에는 정난종(鄭蘭宗).정광필(鄭光弼).정복겸(鄭福謙).정유길(鄭惟吉).정창연(鄭昌衍) 등 5대조의 약력과 광해군·인조 때 봉사했던 그의 행적이 적혀있고, 말미에 부인과 자손의 약력과 명문(銘文)이 새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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