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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0] 군자금 모금 통고문 일본 헌병에 넘겨준 패륜 악덕지주 처단한 후 체포돼 순국한 '김한종'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13 09:59:19
  • 수정 2023-10-13 1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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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김한종, 1883 ~1921, 독립장 (1963)


우리 4천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오랑캐(島夷:일제)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예축(豫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본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징계할 것이다. -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포고문


# 스무 네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홍주 의병에 가담


김한종[金漢鍾, 1883.1.14 ~ 1921.8.11(음력7.8)] 선생은 1883년 1월 14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서 김재정(金在貞)의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일우(一宇), 자는 경애(敬愛), 본관은 금령이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학행이 뛰어나고 충효의 전통을 지닌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다. 부친 또한 가학(家學)을 이어 성리학을 공부한 유생으로 집안의 아이들과 인근의 학동들을 교육하는 훈장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충효사상을 전수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을 목격하면서, 선생과 부친은 척사적 민족주의를 수용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前) 참판 민종식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홍주성을 탈환하자, 선생과 부친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즉 부친 김재정은 성달영과 함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고, 선생 또한 부친을 따라 홍주 의병에 참여하여 항전하였다. 그리고 홍주의병이 일본군에 패하자, 선생과 부친은 그에 가담하였던 의병장들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재기를 도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충효의 전통을 계승한 행동이었고,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 한 척사적 민족주의의 발로였던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충청도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우선 선생은 사방으로 동지들을 찾아 규합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주요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 동지를 규합하던 중 선생은 조선 총독이 부여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 7월 김경태·김재창과 함께 선생은 부여의 이철영 집에서 조선 총독 처단 계획을 모의하고 추진하여 갔다. 하지만 선생과 동지들은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조선 총독 처단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각기 피신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 선생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동지들을 널리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채기중의 소개로 박상진을 찾아가 만나게 되었다. 1917년 음력 6월경 첫 만남에서 둘은 서로 의기 상통하였던 것 같다. 선생이 대한광복회에 가입하면서 곧바로 충청도지부장에 임명되고, 그 조직 책임을 맡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대한광복회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에 나서. 소지한 권총 발각되어 첫 옥고


이즈음 박상진·채기중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지도부는 조직 확대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초 대한광복회가 목적하였던 사업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대한광복회는 활동자금과 군자금을 부호들의 의연금과 일제의 세금 탈취로 마련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세금을 탈취케 한 적도 있었고, 또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을 습격하려고 계획한 일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부호들의 비협조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 친일 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대한광복회 지도부는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반입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상진은 1916년 만주로 가서 권총을 구입하여 갖고 들어오다가 서울에서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총포화약령(銃砲火藥令) 위반으로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로 옥고를 치렀다.


김한종 판결문선생이 박상진을 만난 시점은 그가 출옥한 직후였고, 대한광복회 지도부가 조직 재건과 확대를 위해 애쓰던 시기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선생과 대한광복회의 조직을 확대하려던 박상진은 의기 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둘은 모두 의병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혁명적 투쟁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으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곧 지부의 조직과 확대에 힘을 쏟았다. 우선 친분이 있던 장두환을 가입시키고, 그로 하여금 천안·아산 지역의 자산가 조사와 광복회원 모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예산·홍성·청양 지역을 중심으로 친분 있는 인물들과 금령 김씨 문중 사람들을 상대로 광복회 가입을 권유하여 갔다. 선생의 노력의 결과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는 홍성·예산·아산·청양·천안을 중심으로 설치되었고, 그 참여 인원은 60여 명에 달하였다. 참여 인물 가운데는 선생의 부친과 삼촌을 비롯한 문중 사람들이 많았다. 또 선생 및 부친과 함께 홍주의병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참여 인물의 직업도 농업·미곡상·서당 훈장·갱부·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가 공화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에도 홍주 의병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는 김한종을 비롯한 척사유림들이 이 시기 이미 척사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의병운동의 투쟁방략은 계승하고 있었지만, 그 운동이념만은 척사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근대적 민족주의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충청도 일대 군자금 모금에 나서 막대한 자금 수집. 밀고 일삼는 친일 부호배 처단 명령


어쨌든 선생은 충청도지부를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한광복회의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하여 갔다. 우선 충청도와 경기도에 연락 거점을 마련하였다. 즉 예산·연기·인천에 곡물상을 개설하여 이를 광복회 본부 및 지부와의 연락 및 활동 거점으로 활용한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선생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충청도지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먼저 배당금 통고문이나 고시문·경고문을 발송한 뒤, 찾아가 의연금을 받아오는 형식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일제측 문서에 따르면, 선생의 주관 아래 충청도지부에서 발송한 고시문은 160여 통에 이르고, 군자금 모금액 또한 170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책 1권이 1원 수준이었으며, 170만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100억 원 이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선생은 박상진 등 지도부와 상의하여 극단적 처방을 강구하였다. 그것은 군자금 강제 모집을 결행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먼저 선생을 비롯한 지도부는 자산가들에게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고문을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은 처단하도록 지령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박상진의 명령을 받아 악덕지주로 지탄의 대상이었던 경북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처단케 하였다. 이후 선생은 충청도지부에서 처단 대상으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김한종 선생과 광복회원 판결 기사도고면장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에게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은 다시 부하 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한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 낼 리 없으므로 이 자를 살해하여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중략) 동면장이 악인인 증거는 첫째, 면장으로서 면민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 또 하나는 면서기의 사택을 몰수하여 자기의 사택으로 하고 둘째, 전 면장의 공금 소비를 교묘하게 꾸며서 옥사케 한 것이다.


# 군자금 모금 통고문 일본 헌병에 넘겨준 패륜 악덕지주 처단한 후 체포돼 순국


이 같은 이유로 선생은 천안 읍내에서 박용하의 처단을 장두환에게 지령하자, 그는 김경태와 임세규에게 실행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1월 24일 김경태와 임세규는 선생과 장두환의 지령에 따라 박용하를 집으로 찾아가 처단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1월 27일 선생은 조직이 탄로나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뒤, 경성복심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음력 7월 8일, 38세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한말에는 척사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펼쳤고, 이후 1910년대에는 점차 근대적 민족주의 이념을 수용,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표출하였다. 더욱이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 방략은 이후 암살단·주비단·의열단·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켜 간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점이 우리가 선생을 기리는 이유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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