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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89] 조선의용대 병력과 함께 광복군에 합류...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광복 때까지 헌신 '이종건'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13 09:42:50
  • 수정 2023-10-13 09: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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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종건, 1906 ~1960, 독립장 (1977)


1935년 7월 5일 우리는 중국 수도 남경에서 5당을 통일하여 전민족군 진영―조선민족혁명당을 창립하였다. 이는 수십년래 조선혁명통일운동의 최대 성공인 동시에, 또 국외 독립당촉성회와 국내 신간회의 혁명적 전통의 광휘한 계승인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성립 당시부터 그의 최고 목표는, 즉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의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전민족 역량을 총단결하며 또 중한 양 민족 연합항일전선을 건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 선생이 활동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창립 8주년 기념 선언에서(1943.7) 


# 휘문고보 졸업 후 은사들 주선으로 중국 망명, 동포들 보호하는 한족동맹회 가입


이종건(李鍾乾, 1906.5.14 ~ 1960.6.19) 선생은 1906년 5월 14일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속창리에서 태어났다. 동초(東初)·세장(世章) 등의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는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국망이 눈앞에 보이던 한말에 선생은 태어났고, 경술국치 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 자행되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 시기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선생 또한 항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선생은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 시기는 1928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직후였다. 선생은 모교 은사인 이승규와 안재홍의 주선으로 중국 망명을 단행하였다. 물론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이었지만 선생은 우선 산동성 태원에 있는 성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는 중국어와 선진 학문을 익히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2년간의 모색기를 거쳐 1931년 9월 북경에서 한족동맹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여기서 선생이 맡은 역할은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고,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일이었다. 혈기 왕성한 애국 청년들이 하던 그런 일을 선생 또한 맡은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일제 밀정 신 아무개를 색출하여 처단하였고, 그로 인해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상해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산하의 교민 자치기구인 대한교민단에 들어갔다. 당시 상해 대한교민단장은 김구였고, 의경대장은 박창세였다. 이 때 이들과 맺은 인연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계속 이어졌고, 그것은 선생의 큰 자산이기도 하였다. 상해 대한교민단 의경대원으로 선생의 임무는 북경에서 맡은 것과 비슷하여 임정 요인들과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인 출입국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밀정 및 친일파를 색출하여 처단하는 일도 맡았다.


# 스물 다섯 살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일하다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학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상해 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과 그 후신으로 1932년 1월 조직된 한인청년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즉, 이때부터 독립운동 정당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인청년당은 한국독립당 산하의 청년운동 조직이었고, 투쟁방식으로 의열투쟁 방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로 국내와 만주에 청년 독립투사를 파견하여 암살·파괴·폭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방식은 당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산하의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상해 도착 이후 임시정부와 관련된 이들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선생의 명망은 점점 높아져 1931년 12월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출 의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1933년 3월 의원직을 사임하기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이봉창·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악랄한 임시정부 파괴 책동에 맞서 임정을 사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한 후에도 선생은 한국독립당 남경지부에서 이광제·박찬익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 시기 주소가 남경 중앙대학 기숙사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선생은 중앙대학에서 고등 학문을 수학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로 설립된 것이 바로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이었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들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일신시켰고, 그에 따라 중국국민당 정부는 지금까지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특히 1933년 5월 김구와 장개석의 회담에서 한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독립군 장교로 훈련·배출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진과부 등 중국측 실무요원들과 협의를 거쳐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된 것이다.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발전할 때 일본 본토와 동아 대륙의 교량 역할을 하는 한국 및 남만주 지방의 일본군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침략 원흉을 제거하며, 노동자·농민대중의 지휘 및 중국군과의 연합을 통해 한국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한인특별반 입교생들의 사명이었다.


이러한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김구가 고문자격으로 총괄하였으며, 입교생들에 대한 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을 중심으로 이범석·오광선·조경한·윤경천·한헌 등의 교관이 담당하였다.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추천으로 한인특별반에 입학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는데, 동기로는 김승곤·김일곤·신화균·박재혁 등 60여 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장 조완구 공함(1931)#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활동하며 단일 민족대당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 창당에 동참


졸업 후 선생은 김구가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생들과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을 모아 결성한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곧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동참하였는데, 그것은 선생이 소속하였던 한국독립당이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선생이 활동했던 30년대의 정세는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한 필요성이 더욱 증폭되었다. 때문에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은 항일 역량을 결집하고자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32년 11월 상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 등이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만들었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항일 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반일 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맹 단체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결속력과 통제력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반일 항전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 민족대당의 결성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 민족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19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원칙 아래 상해 한국독립당(조소앙)·신한독립당(이청천)·의열단(김원봉)·조선혁명당(최동오)·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민족혁명당은 ①구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②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한다, ③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고 국민의 생활상 평등의 제도를 확립한다, ④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게 분급한다, ⑤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한다, ⑥국민의 일체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하에 통제한다 등 17개항의 진보적 강령을 가진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물론 이는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삼균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생도 이러한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에 공감하여 민족혁명당 창당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사임원서(1933)이후 선생은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과 민족혁명당 군사부(책임 이청천)에 편입되어 교양 훈련을 받았다. 남경 모가원 등에 머물면서 신익희로부터 ‘국내외 정세’, 한일래로부터 ‘산술대수’, 윤세주로부터 ‘사회과학’, 김두봉으로부터 ‘한글’, 안일청으로부터 ‘한국역사’, 이청천으로부터 ‘유격전술과 정신훈화’ 교육 훈련을 받은 것이다. 나아가 민족혁명당의 군사부 요원으로 중국 군경의 협조 아래 남경·상해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탐 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그리고 일제 시설 파괴 공작 등을 전개하며 항일 투쟁을 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활동은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바뀌어 갔다. 즉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거점과 병참선'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을 감행하며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세력은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재건 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최동오)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결성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 결성이 그것이었다. 특히 민족혁명당과 민족전선을 이끌던 김원봉은 중국국민당 수뇌부와 한·중 합작에 의한 항일 연합전선의 구상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재차 한국 청년들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시켜 실전에 배치하기로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1937년 12월 선생 등 80여 명의 청년들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즉 민족혁명당의 주선으로 대일 항전에서 활용할 특별 공작훈련을 받기 위해 강서성 성자현에 위치한 성자분교의 특별훈련반에 입교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남경 점령으로 1938년 초 성자분교가 호북성 강릉으로 옮겨가자 여기에서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그 해 5월 24일 졸업하게 되었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80여 명의 졸업생들은 교관이던 김홍일의 인솔 아래 조선민족혁명당 본부가 있는 한구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민족혁명당 지도부는 이들을 각 전구에 배속시켜 대일 항전에 활용할 것을 중국 정부에 제안하여 승인 받았다.


이로써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 양자강 연안 한구에서 민족혁명당의 무력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고, 그에 따라 한·중 두 나라 군대의 연대 활동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활동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선생이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이었고, 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뒤 만들어진 부대 편제표에 지대 본부 요원으로 명기된 자료가 있을 따름이다.


# 조선의용군 제1구대에 소속돼. 부대는 일본군 통신시설과 교량 전차 폭파하는 전과 올려


이들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선생은 민족혁명당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제1구대에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1구대의 연대 활동 대상은 중국군 제9전구사령부 예하 부대였다. 그렇다면 선생이 속한 제1구대는 1938년 10월 한구를 떠나 제9전구사령부가 있는 호남성 장사로 갔을 것이다. 중국군 제9전구는 곡창지대 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의 양자강 이남과 강서성 서북부를 관할하는 가장 중요한 전구로서, 여기에는 중국군 최정예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이곳에서 선생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제1구대 대원들은 중국군을 도와 연대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1938년 12월초 일본군이 장사 침공을 개시하자 제9전구 사령부 정치부를 도와 전투 중 화재로 피해를 당한 이재민들의 구호사업 및 도시 복구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복구사업이 완료된 뒤에는 1939년 1월 제9전구 예하 여러 부대의 전선에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즉 제1구대 대원들은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여러 차례 전투에 직접 참가하면서 수시로 안개와 야간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구사하였다. 또 파괴공작에도 참여하여 일본군의 통신시설과 교량, 자동차와 전차까지 폭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일본군의 투항을 유도하는 선무공작(宣撫工作), 일본군 포로에 대한 심문, 적정 탐지 및 정보수집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동시에 각처에서 한국 청년들을 모집하여 조직 확대에 노력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용대는 1939년 10월 대본부를 총대(總隊)로, 구대를 지대(支隊)로 변경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립 제8주년 기념 선언서(1943)# “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나아가자.” 조선의용대 호남성에서 화북 만주지역으로 진출


나아가 조선의용대는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체 점검을 통해 종래의 활동 노선과 투쟁방식에 일대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1939년 10월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행사에서 제기된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 추진된 무장투쟁 강화와 그를 위한 화북·만주 진출의 결정이었다. 이는 그동안 조선의용대의 활동지역이 중국국민군의 작전지역으로 한정되어 실제 전투는 물론 적후방(敵後方) 공작이 기대에 못 미쳤고, 또 한인 동포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라 대원 모집 활동에도 어려움이 많았던 탓이었다. 때문에 적후방 공작을 본격화하여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서 항일 근거지를 구축하고, 조직 확대를 꾀하여 독립 전투부대로서 무장 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화북·만주지역으로의 진출이 필수적이었다.


이 같은 북상 계획에 따라 조선의용대 제3지대 대원들은 1939년 12월 호남성 형양(衡陽)을 출발하여 10일 만에 강서성 북쪽에 위치한 제9전구 19집단군 사령부 소재지인 분의(分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19집단군사령관 나탁영과 의용대원들의 스승이자 민족혁명당 중앙위원이었던 참모장 김홍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어 제3지대 대원들은 최전선 지구 봉신방면으로 이동하여 전방공작에 뛰어 들었다. 제3지대 대원들은 그 해 12월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야습하였고, 또 철수하면서는 길가 촌락의 벽에 분필과 목탄을 사용하여 일어로 선무표어를 써놓고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차례 일본군에 대한 선무활동을 전개하면서 1940년 10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던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체제 정비와 대원 훈련에 힘썼다.


# 조선의용대 병력과 함께 광복군에 합류.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광복 때까지 헌신


이후 1941년 1월 초 박효삼 지대장의 지휘 아래 조선의용대 제3지대 병력은 화북·만주로 들어가기 위해 중경을 출발하여 호북성 노하구(老河口)를 거쳐 3월 상순에 하남성 낙양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와 있던 제1·2지대에 더하여 제3지대가 도착함에 따라 같은 해 봄에는 조선의용대 대원 대다수가 낙양에 집결하였다. 여기에서 이들 각 지대는 제3지대장 박효삼과 정치위원 윤세주를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그것은 국·공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던 당시에 팔로군이 화북지역을 석권하고 있었으므로 황하를 도강하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황하를 건너기 위해서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가까운 민족혁명당 계열의 제3지대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조선의용대 병력은 박효삼의 활약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승인을 얻어 1941년 3월 중순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의 화북 진출은 1941년 3월 중순에서 5월 하순에 걸쳐 이루어졌다. 즉 중경에 있던 김원봉을 중심으로 총대 본부의 인원과 일선 공작원을 제외한 조선의용대 병력의 80퍼센트가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선생은 이때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에 동참하지 않고 잔류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5월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잔류 병력이 광복군에 합류할 때 동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8․15광복 때까지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요원으로, 그리고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8․15광복 후 선생은 1946년 봄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 땅에서 독립운동 중에 꿈꾸던 큰 뜻을 펴지도 못한 채,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1960년 6월 19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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