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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88] 양진여 “나라 독립을 원하며 이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07 22: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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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양진여, 1860 ~1910, 독립장 (1977)


무릇 왜적(倭賊)은 우리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수인 것이다. 왜적의 머리는 무슨 쇳덩이기에 우리 칼날이 들어가지 않으며, 왜적의 몸은 무슨 돌덩이기에 우리의 총탄이 박히지 않겠는가. 오늘 행하지 못하면 내일 행할 것이요, 금년에 죽이지 못하면 내년에는 기필코 죽이기로 맹서하였다. - 선생과 같은 시기 활동한 어느 호남 의병장의 격문 중에 


# 전남 장성의 평민 출신 의병장. 광주 대치산에서 의병 활동 시작. 아들 역시 의병장이 돼


무릇 왜적(倭賊)은 우리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수인 것이다. 왜적의 머리는 무슨 쇳덩이기에 우리 칼날이 들어가지 않으며, 왜적의 몸은 무슨 돌덩이기에 우리의 총탄이 박히지 않겠는가. 오늘 행하지 못하면 내일 행할 것이요, 금년에 죽이지 못하면 내년에는 기필코 죽이기로 맹서하였다. - 선생과 같은 시기 활동한 어느 호남 의병장의 격문 중에 -


양진여(梁振汝, 1860.5.11 ~ 1910.5.30) 선생은 1860년 5월 11일 전남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호는 서암(瑞菴)이다.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손자 양일룡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전남 장성군 불태산(佛台山) 소재 정이암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거의할 때 격문을 살포하여 의병을 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글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양반 유생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선생이 1907년 7월까지 전남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에서 주막집을 경영하였다고 하는 재판기록과 선생의 아들로서 같은 시기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양상기의 재판기록에도 광주진위대 병사 출신의 상민(常民)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선생은 평민으로 장성에서 주막집을 경영하였고, 그를 통해 세상 물정을 배우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막을 드나드는 여러 지방 상인들과 여행객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만행, 친일파의 발호, 봉건 정부의 부정부패 등을 전해 듣고 반일민족 의식과 반봉건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가중되는 일제의 침략 만행과 ‘정미7조약’ 부수 각서에 따른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사태는 선생이 이를 피부로 느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광주진위대 병사로 복무하던 아들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원하지도 않던 광주경찰서 순사로 발령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에 선생은 거의를 결심한 뒤 전남 광주·담양·장성 일원에 격문을 살포하여 의병 동지들을 모았다. 선생의 거의 시기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1907년 10월경 3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한 뒤, 광주와 담양 경계에 있는 대치산을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양진여 선생 판결문(1910년 4월 13일, 고등법원)거의 직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곧바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과감한 활동은 하지 않고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그것은 이 시기 호남지방에는 기삼연 창의 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생 의병부대가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한 뒤, 호남창의회맹소가 전남·북 일대로 분산되어 활동하기 시작한 1908년 2월 이후일 것이다. 그것은 이 시기 선생의 의병부대가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했던 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이합집산의 유격전술로 대치산, 추월산 이동해가며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습격, 격파


선생의 의병활동 무대는 주로 광주·담양·장성·창평 등지였고, 그 활동 양상은 크게 3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일본 군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둘째는 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식민관리의 처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병부대를 유지 운영하고 그 전투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이 그것이다.


먼저 선생의 의병부대의 일본 군경에 대한 무장투쟁은 단독으로, 혹은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수행되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1908년 10월 23일 단독으로 담양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항일 무장투쟁의 기치를 올렸다. 이어 10월 26일에는 나까코지[中小路] 군조가 인솔하는 일본군 헌병과 순사로 편성된 이른바 '폭도(의병)토벌대'를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일본군 광주수비대와 함께 한인 순사들로 특설순사대를 편성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를 추적하여 왔다. 11월 5일부터 광주·장성·담양 일대에서 감행된 이들의 추격을 따돌리면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구사하였다. 즉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의진을 형성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장성·담양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어 11월 23일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치산에 주둔하여 광주 탈환 작전을 계획하였다. 광주 탈환 작전은 이전에 기삼연 창의대장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가 시도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작전은 그때 참여했던 전해산 의병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주라는 대도시를 탈환함으로써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나아가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호남의병장 사진(1909)# 의병들, 일제 식민 관리 처단. 혹한 견디며 전투 벌이기 위해 군수품 조달 투쟁 벌여


이 작전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즉 선생과 전해산·강판열 의병장이 이끄는 연합의병부대는 11월 23일 우다[宇田] 특무조장이 거느린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맞서 연합의병부대는 대치산에서 3시간의 사격전을 벌여 적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재차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연합 의병부대의 광주 탈환 작전은 보류되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강판열 의병장은 연합의병부대를 분산하여 적의 반격에 대처하는 방안을 세웠다. 이러한 작전 방식은 후기 의병전쟁에서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부대들이 흔히 구사한 이합집산의 유격 전술이었다.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강판열 의병장도 바로 이때 그러한 작전을 편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연합 의진을 나와 전남북의 경계인 담양군 추월산으로 이동하여 갔다.


그런데 이때 예상대로 11월 25일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가 선생의 의병부대를 공격해온 것이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추월산 고지에서 포까지 쏘며 적들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을 공격하였고, 적지 않은 전과도 올렸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도 우수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반격으로 15명의 인력을 상실하고, 포와 화승총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가 주로 전투역량을 재충전하기 위한 군자금 조달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을 벌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양진여 선생의 사형 집행을 알리는 글다음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식민관리에 대한 처단 투쟁을 벌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14일 광주 오치동에서 일본인 우체부 에토오[江藤喜次郞]를 처단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에는 광주 대치산에서 추월산으로 이동하는 중에 만난 일본인 세무서원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가 일본인 우체부와 세무서원을 처단한 것은 이들이 경제침탈의 앞잡이로 민중의 원성을 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세무서원뿐만 아니라 우체부도 조세 징수와 운반 임무를 맡고 있었던 탓에 의병부대의 표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 식민관리의 처단 활동은 감정적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한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응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주요활동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초기부터 꾸준히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의병부대의 유지와 전투력 강화를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초기부터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이 있었겠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1908년 7월 5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날부터 선생은 양동골·김성국·김동수 등 의병부대원을 거느리고 광주·담양군 일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에 나선 것이다. 8월 23일과 24일에도 선생은 의병대원을 인솔하여 군자금 징수 활동을 하였다. 즉 23일에는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촌, 24일에는 광주군 하대곡면 주부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광주군 갑마보면 면장 집에서 짚신과 백목(白木; 면포) 등을 거두었는데, 이는 군수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일제, 임시한국파견대 편성하여 ‘남한대토벌작전’ 짜고 그물로 사냥하듯 의병들 추적


이듬해인 1909년에도 선생 의병부대의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짚신과 백목은 필수품이었는데, 의병부대는 적을 피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고, 또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데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9년 1월 12일과 18일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리 이장 집에서, 2월 하순에는 광주군 오치면 방축내동 동장 집에서 백목 등을 군수품으로 수합하였다.


호남창의동맹비이러한 활동은 같은 해 3·4월까지 지속되었다. 3월 15일에 광주군 오치면 삼취동 동장 집에서 백목을 거두었고, 3월 23·30일에 광주군 석지면 연지촌과 상촌동 동장 집에서 군자금을 거출하기도 하였다. 다음달 4월 1일과 2일에는 전남 창평군 지곡면의 동장 집에서, 4월 7일에는 전남 광주 석지면 낙촌동 동장 집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수합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4월 10일과 11일에도 광주군 갈전면 수곡동과 장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런데 선생의 의병부대가 벌인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은 주로 지방 유지인 동장과 면장을 상대로 하였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이 지방 유지로서 봉건 지배층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선생 의병부대의 그러한 활동은 평민 의병들의 반봉건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평민 의병부대 활동에서 드러난 특징이다. 생명을 담보로 평민 의병부대가 실천한 이러한 반일·반봉건 투쟁이야말로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 “나라 독립을 원하며 이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평민 의병장으로 선생은 그 뜻을 다 펴기도 전에 피체되고 말았다. 즉 선생은 2년 가까운 의병활동과 병으로 향리에 은둔하여 요양하고 있던 중, 1909년 8월 25일 일본 군경에 피체된 것이다. 이때는 일제가 본토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임시한국파견대를 편성하여 호남 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 계획을 세워놓고, "사방에 그물을 치듯이 해놓고 촌락을 샅샅이 뒤지던" 시점에서 일본 군경에 잡힌 것이다.


이후 선생은 기유각서에 의해 일제가 사법권을 장악한 뒤인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선생은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도 마찬가지의 형이 내려졌다. 고등법원에도 상고하여 보았지만, 그것도 1910년 4월 13일 기각됨에 따라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0년 5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셨다. 그러나 순국 당시에도 선생은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을 받고 죽으니 유감"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선생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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