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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87] 이동녕 “강력한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광복군을 결성해야 한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07 22:16:36
  • 수정 2023-10-07 22: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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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동녕, 1869 ~1940, 대통령장 (1962)


여러 학생들이여 우리의 용기가 좌절하였는가. 아니다. 우리의 정열이 식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할 뿐입니다. 오늘에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한번 더 분명히 발표하기 위하여 다시 두 손을 높이 듭시다. 적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천지가 울리는 만세를 합창합시다. 세계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기를 높이 달아야 하겠습니다. -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선생이 남녀학생에게 발포한 포고문 중에서 (1919. 10. 15) 


# 스무 살 때 만민공동회 참여하여 투옥. 출옥 후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해


이동녕(李東寧, 1869.2.17 ~ 1940. 3. 13) 선생은 186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부친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 이명으로는 이량(李亮) 등이 있다. 전통 명문가인 연안이씨 가문, 그리고 부친이 경북 의성군수와 영해군수를 역임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특히 10세 때부터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조부 이석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였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은 1885년 서울 봉익동으로 이사하였으나, 곧 부친을 따라 영해로 갔다.여기에서 선생은 군수로 집무하던 부친을 도와 선정을 베풀어 '작은 군수'로까지 불렸다고 한다.


1892년에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원산으로 가서 부친을 도와 육영사업에 힘썼다.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진사시험에도 합격한 선비였으나 선생은 전통 유학 사상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선생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새롭게 형성해 갔던 것이다. 선생이 부친을 도와 원산에서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친 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윤치호·이상재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선생은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봉건정부의 실정을 규탄 성토하고, 외국으로 넘어가는 각종 이권의 양여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민중들과 함께 1898년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하여 개화·개혁운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옥파 이종일을 예방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뒤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던 이종일은 이때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민권운동과 개화 자강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수십 편의 논설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근대화론을 마음껏 펼쳤다. 그 내용은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고 정부의 고위관리가 무능부패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자강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자강을 급히 서둘러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게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사발전에 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시해야 한다’는 개화 자강론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후 서전서숙 설립


190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이상재·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의 평등·평화·박애주의를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상동교회에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근대식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을 민족운동의 역군으로 육성하여 갔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한 선생은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키워갔다. 그러나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가자 선생은 여준 등에게 학교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서전서숙 사진#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해야 한다” 만주의 독립군 기지 개척


귀국 직후 선생은 양기탁·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 등 20여명의 창건위원과 함께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선생은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고, 또한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하였다. 이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교육이나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의 방식으로는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장투쟁으로 전환을 제기한 것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생각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의 원천이 되었고, 경술국치 직후 실제로 실현되었다. 즉 선생과 이회영 일가 등 신민회 동지들은 1910년 11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것이다. 이들은 황무지를 피와 땀으로 개척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으며 앞으로 다가올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선생이 초대 소장을 맡았던 신흥강습소는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모체로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렇듯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선생은 1914년 이상설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만주·노령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역량을 결집하여 일제와 일대 결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다. 특히 대한광복군정부는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주·노령 지역을 3개 군구로 나누어 통제권을 행사하여 갔다. 그리고 국경지대인 북만주 왕청현 나자구의 한인촌에 광복군 사관양성을 위한 나자구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의 양성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모체가 된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돌입에 따라 탄압을 받아 뜻대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국이 됨으로써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제는 공동 방위체제를 확립하면서 자국 내에서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광복군정부의 모체가 된 권업회는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지도자들은 물론 연해주 지역의 대다수 한인들까지 가차없이 투옥되고 추방당했다.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기까지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선생은 좌절하지 않았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이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연해주와 만주에 흩어진 항일 민족역량을 한데 모으며 결전의 시기에 대비해 갔다. 길림성에서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조소앙·신규식 등 3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흥 시절 임시정부 요인 사진(1935년 추정)# 임시정부 주석 국무령 국무총리 등으로 20여 년 동안 임시 정부를 이끌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특히 선생은 통합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남녀학생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천주교 동포여> <재내외 일반 국민에게> 등 여러 차례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민족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나아가 1921년 1월 국무총리 이동휘, 5월 노동국 총판 안창호가 잇달아 사임하자 선생은 국무총리 대리로서 임정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소집 제의 등 임정 불신이 표면화되자 1922년 선생은 안창호·김구·조소앙·홍진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선생은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3년 초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정에 대한 개조론과 창조론이 제기되고, 심지어 창조파 회의에서는 임정을 부정하고 새로이 '한'정부를 수립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에 선생은 김구와 함께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고, 이들을 상해에서 추방함으로써 임정의 정통성과 법통성을 지켜 나갔다.


이후 1924년에 들어와 선생은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에 따라 대통령의 직권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임정의 최고 영도자로서 선생은 눈물까지 흘리며 약화되어 가는 임정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고 하니, 선생의 애국충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1925년 국무령제 개헌 직후 선생은 잠시 내각 수반인 국무령을 맡기도 하였고, 김구를 지원하여 그 내각을 성립시켰다. 그것은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고 언급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1927년 국무위원회제 개헌 이후에도 선생은 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권위를 신장하고, 영향력을 제고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동녕 유묵 사진.# 신민회 계승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창당


193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김구·안창호 등과 함께 임정의 정치적 기반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이사장을 맡아 이를 지도하여 갔다.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운동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였다. 즉 1930년 민족주의 세력들은 "종래의 지방적 파벌투쟁을 청산하여 민족주의 운동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 운동의 활성화와 임시정부의 여당적인 성격을 지닌 정당을 조직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국독립당의 창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선생을 비롯한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였다.


따라서 선생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창당 세력은 한말 신민회의 활동을 계승하고, 1910년대 상해를 중심으로 조직된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통해 성장한 청장년층과 3․1 운동에 참가한 뒤 국외로 망명한 인물들, 그리고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 기여했고, 나아가 1920년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앞선 시기의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정강·정책을 제시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안창호·이유필·김두봉·안공근·조완구·조소앙 등 기초위원 7명이 만든 한국독립당의 당강은 다음과 같다.


1. 국내 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2. 엄밀한 조직 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진(協進)을 도모한다.

4.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히 하고 국민의 기본권리를 보장할 것

5.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한다.

6. 생활상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보급함에 충분한 공비(公費)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국민의 구학권(求學權)을 평등하게 한다.

7.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시킨다.

8.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조성에 노력한다.


이와 같이 선생의 역할은 당·정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도 백범 김구가 선생과 상의하여 결행한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정 요인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절강성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항주(杭州,1932)·진강(鎭江,1935)·장사(長沙, 1937) 광동(廣東, 1938)·유주(柳州, 1938)·기강(綦江, 1939)으로 옮겨 다니며 풍찬노숙하며 투쟁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한시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놓지 않았고, 피난의 와중에도 1935년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이 되었다.


주석이 된 직후 선생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그 해 11월 김구·이시영·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적의 총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은,


1.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 역량을 총집결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4.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5.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6.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등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던 독립운동 정당이요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다. 이 같은 한국국민당에서 선생은 송병조·조완구·차리석·김붕준·안공근·엄항섭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수호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강력한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광복군을 결성해야 한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거점과 병참선'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 결성이었다.


이동녕 장례식 사진(1940).이 때 선생은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1937년 7월 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갖고, 3당 합동의 기초가 된 공동 결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 3당과 미주 등지에 산재한 대한인국민회·동지회·단합회·한인 애국단 등이 모여 임시정부를 옹호, 지원하는 외곽단체로 광복진선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선생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은 강력한 항일전의 수행을 위해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는 군사간부의 양성과 함께 한인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지역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군사 특파단 파견이었다.


# 일흔 노구로 광복군 창설하다가 순국. “단결하라”는 유언에 따라 정당들 통합


군사특파단 파견은 임정이 1939년 기강에 도착하여 선생이 네 번째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내각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조성환을 단장으로 황학수·나태섭·이준식 등과 청년공작원 노복선·서파 등으로 구성된 군사 특파단이 서안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20여 만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증세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바로 앞두고 낯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선생의 마음은 조국 광복에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임정 산하의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세 정당만이라도 통합을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그 해 5월 세 정당이 통합하여 (중경)한국독립당을 발족하였으니, 선생의 공적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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