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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86] 김병조 “독립운동사를 편찬하자. 국제사회에 우리 독립투쟁을 알리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04 06: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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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김병조, 1877 ~1948, 대통령장 (1990)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중략)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 3.1운동 때 선생이 작성하여 살포한 <경고관헌문> 중에서 -



# 스물 일곱 살 때 서당 인수해 신식학교인 변산학교로 개편, 운영


김병조(金秉祚, 1877. 1. 10 ~ 1950) 선생은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군 동주면 봉명동에서 김경복(金京福)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금령(金寧)이고, 자는 윤석(允錫)이며, 호는 일재(一齋)이다. 넉넉지 않은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재주가 남달랐던 선생은 부친 후원 아래 6세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그리하여 20세가 되던 해부터는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 서당을 열고 훈장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침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보면서 선생은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갔다. 특히 선생이 태어난 정주는 1811년 홍경래 란의 중심지였고, 또 중국을 거쳐오던 서구 문물의 수입 루트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근대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곳이었다. 다른 지방보다도 먼저 기독교 교회가 설립되고 신식 학교가 들어선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선생이 한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이러한 시대적·지역적 분위기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외세를 막고, 민족 발전을 위해서도 선생은 사회 근대화가 필수적임을 인식한 것이다. 선생의 이 같은 생각은 1903년부터 구체화되었다. 그것이 변산학교의 설립과 운영이었다. 1903년 구성군 방현면 변산동 삼희재서당을 인수한 선생은 신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로 개편하여 근대식 민족교육에 앞장서 간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나라와 민족의 앞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선생에게 국망 위기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국권강탈조약인 을사늑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했던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민족 실력양성운동인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와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을 모색하여 갔다.


# 목사가 되어 3.1운동 추진에 깊숙이 관여


1908년에 들어와 선생이 그간 운영한 변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개편한 것도, 1909년 9월 김관근 목사 인도로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미치기를 기대한 것이다. 즉 선생은 목회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과 민족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선생은 기독교적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선생이 1913년 3월 36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러한 인식에 따른 결정이었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펫트(馬布三悅) 목사가 창설하여 1907년 첫 졸업생을 낸 기독교 장로교계통의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계 3.1운동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이승훈을 비롯하여 민족대표로 활약한 길선주·유여대·양전백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선생은 여기서 수학하면서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훈·송병조·김인전·김승만·장덕로 등과 교분을 쌓아 평생의 친구이자 독립운동의 동반자가 되었다.


1917년 6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그 해 8월 목사 안수를 받고, 관리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선천남 교회당에서 평북노회가 열리게 되자 선생은 유여대·장덕로·김승만 등과 선천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 일행은 양전백 목사 집에서 이승훈을 만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3.1운동 추진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이승훈은 3.1운동 추진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2월 초순 이승훈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 받았다. 독립운동 추진 논의를 위해 상경한 이승훈은 2월 중순 최남선·송진우·최린 등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3.1운동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승훈도 이때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때문에 양 세력의 독립운동 계획은 쉽게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한 이승훈과 천도교계를 대표한 최린은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 아래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 민족대표 33인으로 선정되어 평안북도를 다니며 시위 확산에 힘 쏟아


이에 이승훈은 곧바로 서북지방으로 내려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순방하며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우선 평양에서는 장로교계의 원로 지도자인 길선주 목사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그런 다음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와 선생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을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만난 것이다. 여기서 이승훈은 천도교와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선생과 이명룡·유여대·양전백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 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사료조사편찬회 사진(1919이렇게 해서 선생은 기독교 대표의 일원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과 유여대가 다른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유여대는 의주에서 대중적인 만세시위운동의 전개 책임을 맡았고, 선생과 김승만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의 조직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생과 유여대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할 인장을 이명룡에게 미리 맡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3월 1일 같은 시각 서울·평양·원산·선천 등과 함께 유여대가 주도한 만세시위가 의주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평북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왕래하면서 만세시위의 확산과 전파를 위해 힘썼다. 이때 선생은 동포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만들어 살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 “왜놈의 관리된 조선인들아, 무기를 거꾸로 들고 길을 바꿔라.”


식민지 지배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일제의 강압으로 끊어진 민족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3월 7일 선생은 일제 관리로 근무하는 부일배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 발포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중략)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이는 부일배들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지급 받은 무기를 거꾸로 들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 일제를 공격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3.1운동 중, 살포된 격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으로 이해된다.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선생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는데, 구체적인 날짜는 알 수 없지만 4월 중순경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인 4월 22일 개최된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평안북도 선출 의원으로 참여한 사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아마 김구 일행과 함께 중국 안동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4월 중순경 상해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상해 임정에 참여한 선생은 1920년 3월 25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임정에서 선생의 주요활동은 외교 선전 활동과 사료 편찬이었다. 예컨대 선생은 5월 23일 <한국시사진술서>를 손정도·장덕로·김시혁·김승만 등 11명의 기독교 목사와 장로 명의로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고, 세계장로교연합회 및 미주 각 교회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선생은 손정도 목사와 함께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계에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기독교계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 “독립운동사를 편찬하자. 국제사회에 우리 독립투쟁을 알리자.”


<특별사항>(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1919년 9월 10일자 사본)1920년에 들어와 선생은 임정의 지방선전부 이사로 선임되어 국내 선전 활동에도 동참하였다. 지방선전부는 1920년 3월 안창호의 주관 아래 설치된 것으로, "내외에 있는 국민에 대한 선전사무를 강구 집행하는 비밀기관"이었다. 그 조직은 총판을 최고 책임자로 하여 부총판·이사·선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은 지방선전부 총판인 안창호의 추천으로 이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안창호를 도와 지방 선전대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임정의 활약상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고, 국내 통치자료 및 독립운동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이 밖에도 선생의 활동은 임정의 외곽단체와 한인교회,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한 조직 결성 등이 있었다. 1923년 5월 만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외곽단체인 상해 대한교민단과 대한적십자회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한인 자제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천하기도 한 것이다. 또한 상해 한인교회의 목사로서 활동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종교적·민족적 단결을 이루어 가는데도 힘썼다. 나아가 1921년 4월에 신익희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 양민 관계 증진을 도모하고,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상해에서 선생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독립운동사료를 정리 편찬하는 일이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임정에 참여한 선생에게 있어 이것은 일종의 사명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임시정부에서도 사료 편찬에 대한 논의는 진작부터 있었다. 사료 편찬의 필요성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였다. 1919년 5월 12일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조완구는 시정방침에 관한 연설에서 외교에 대해 설명하면서, "장래 방침에는 3월 1일부터 진행한 역사를 편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3.1운동사를 정리하여 국제사회에 일제의 침략상과 그에 대한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독립투쟁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 ≪한국독립운동사략≫·≪독립혈사≫ 저술하고 서간도의 교회 목사로 독립운동의 길 가르쳐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였다. 7월 8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는 시정방침에 관한 연설을 통해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때 그는 전 민족의 대표기관인 의정원에서 각 지방의 독립운동사료를 조사하여 이를 편찬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진행방침>을 발표하면서 "예로부터 한·일의 관계를 국무원에서 조사 편찬 중'이라고 밝혀, 이미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자료로 ≪한일관계사≫를 조사 편찬하고 있는 사실을 알렸다. 그 편찬 기관이 국무원 직속의 임시사료편찬회였다. 안창호는 임시사료편찬회 총재로서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사업을 총괄하였다. 실무는 선생을 비롯한 이원익·김두봉·김여제 등 사료편찬위원들이 맡았다. 그리하여 7월 초순부터 9월 23일에 걸쳐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을 편찬하였는데, 고대로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사료는 김두봉이, 그 이후 독립운동사료는 선생과 이원익이 맡아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시사료편찬회가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과 동시에 해산하자 선생은 이곳에서 수집된 사료를 기초로 ≪한국독립운동사략≫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하고 있다. 모두 1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독립운동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20년 상해 선민사에서 한글과 중문판으로 발간되어 같은 시기 간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함께 널리 보급되어 읽혔다. 이 밖에도 선생은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독립혈사≫와 ≪대동역사≫를 저술하였으며, 1926년에는 ≪한국역사≫의 초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김병조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서문(1921)상해에서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만주 서간도로 옮겨가 집안현 화전자교회와 패왕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선생의 서간도 이주는 국민대표회의 비서장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한 독립운동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임정의 존폐 문제를 둘러싼 개조파와 창조파의 격한 투쟁을 보면서 선생은 상해에서 정쟁에 휘말리기보다는 재외 한인동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방안으로 선생은 경술국치 후 많은 한인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던 서간도를 선택한 것 같다. 물론 서간도 지역의 교회에서 선생을 담임목사로 초빙한 것도 이주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더구나 서간도는 선생의 고향인 평북과는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한 그야말로 '지척지간'에 있었다. 또한 이곳의 이주민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들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서간도로 근거지를 옮겨 목회 활동을 통해 한인 동포들의 종교적·민족적 결속을 다지며 독립운동주체로의 육성을 모색하여 갔던 것이다.


서간도 이주 이후 선생의 관심은 목회 활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재만 한인 기독교도의 정신적 지주로 1926년에 남만노회장, 1932년 북만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교회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선생은 활동 영역을 잃게 되었다. 이듬해 일제에 의해 만주 괴뢰국이 세워지자 민족운동은 물론 목회 활동도 난관에 부딪쳤다. 이에 선생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1933년 4월 귀국 길에 올랐다. 이 같은 결정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서의 활동은 이미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만주국의 성립으로 이제 만주나 국내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기는 매한가지라는 상황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도 생각된다.


귀국 도중 선생은 신의주역에서 일경에 의해 연행되어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일본에 협력하겠다는 자술서 작성을 강요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끝내 거절하였고, 그로 인해 선생은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일제의 항상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활동은 선생의 정착지인 용천군 양서면 일대 30리로 제한되었다. 때문에 선생은 귀국해서도 생존해 있던 민족대표들은 물론 국내에 있던 상해시절의 동지들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선생은 양서면 일대의 동상·북평·신서교회에서의 목회 활동, 그리고 경신학교의 운영을 통하여 암암리에 민족의 앞날을 준비하여 갔다.


# 신사참배 끝까지 거부…은둔지에서 광복 맞았으나 소련군에 끌려간 후 강제수용소에서 순국


그러나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황민화'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 말살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개명(1939. 11) 등의 민족말살정책이었다. 그 중 신사참배문제는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 양심의 문제인 동시에 민족적 양심의 문제였다. 즉 일본 신도(神道)에 대한 신사참배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요, 민족적으로는 식민지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것은 일제에 대한 투항과 친일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때 선생은 신사참배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민족적·종교적 양심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선생은 1941년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 묘두산 아래로 거쳐를 옮겨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다. 선생은 은둔지에서 감격적인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자 선생은 1945년 9월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족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나섰다. 특히 소련군의 북한 공산화 조치에 반대하여 선생은 청년들을 모아 같은 해 11월 광복단을 조직하여 반소·반공·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6년 12월 24일 정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의 소련군 특무사령부로 이송되었다. 그 뒤 선생은 1947년 2월 20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옮겨졌고, 결국 여기에서 1950년 가을 73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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