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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82] 미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하는 항일전선 구축한 '노태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8-13 0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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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노태준, 1911 ~1970, 독립장 (1968)


동모들! 3천만 백의동포의 행복을 위하야 최후까지 지성으로 분투하자! 우리의 전도는 형극(荊棘)과 광명의 착잡한 행로이니, 용감하자! 담백하자! 순결하자! 단결하자! 호조(互助)하자! 호애(互愛)하자! 노력하자! 그리하야 최후의 웃음을 같이 웃자. - 노태준 선생이 1946년 4월 28일 조국 귀환을 앞둔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는 자리에서 -


# 임정 국무총리 노백린 장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노태준(盧泰俊, 1911. 2. 17 ~ 1970. 2. 26) 선생은 1911년 2월 17일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다른 이름으로는 아경(亞敬)·화경(和敬)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의 자녀 2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그의 부친인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장군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뒤, 대한제국 군대의 근대화와 자주화에 힘쓴 분이다. 나아가 일제가 한국 식민지화의 일환으로 1907년 8월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이에 반대해 자결까지 생각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거둔 뒤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분이었다.


그 예로 한말 최대의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것, 보성학교장과 해서교육총회장으로 교육 계몽운동을 펼친 것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금광과 자기 및 피혁회사 등을 경영하며 산업진흥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회복을 지향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도 헛되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노백린 장군은 절치부심하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선생은 노백린 장군의 서울 집 계동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운명과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아버지는 하와이로 망명, 어머니와 함께 한 가난한 어린 시절


대개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렇듯이 선생의 어린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특히 독립운동을 위해 노백린 장군이 1916년 중국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한 뒤에는 더욱 그랬다. 항상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고, 민족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부친으로 인해 생활상 어려움도 있었다. 이를 염려한 노백린 장군은 원산 기독병원에 근무하던 맏사위 이원재 내외에게 장남 선경과 차녀 순경의 장래를 부탁하고 떠났다. 하지만 선생은 노백린 장군이 떠날 때, 5살의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선생은 모친과 함께 향리인 황해도 송화로 내려가 어렵게 지냈다.


그러던 중, 1921년 2월 노백린 장군은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집무를 시작하였다. 노백린 장군의 군무총장 선임은 이미 1919년 9월 통합 임정이 성립되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상하이에 부임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노백린 장군이 향리에 있던 가족들을 불러들임에 따라 선생도 상하이로 간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 2지대 사진선생은 인성학교에 다니며 민족교육을 받았다. 인성학교는 독립운동가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학교로 상하이 대한교민단에서 운영하고 있었지만, 실지로는 임정의 초·중등 교육기관이었다. 때문에 이 학교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민족적 열기에 넘쳐 있었고, 교육내용 또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인성학교를 다닌 선생이 투철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 강릉농고 시절 반일 시위 추진하다가 발각, 상하이로 탈출


선생의 독립의지는 1929년 강릉농업학교에 다닐 때 뚜렷하게 고취되었다. 이때 선생은 노백린 장군이 1926년 1월 중환으로 순국한 뒤, 귀국하여 큰 매형 내외가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강릉에 와 있었다. 그러면서 큰 매형 내외의 보살핌 속에서 강릉농업학교에 다니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점차 확산되어 전국적인 반일 학생운동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박승만·김화철 등과 함께 강릉농업학교를 중심으로 반일 학생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앞둔 시점에서 격문이 발각되어 시위운동은 불발되고, 박승만과 김화철 등은 잡혀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경의 촉수는 선생에게도 뻗쳐왔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다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1930년 전후의 시기로 짐작된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하는 특무공작이었다. 그리하여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가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낙양군관학교 거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


이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있자, 김구는 군사간부 양성사업을 추진하여 갔다. 1933년 봄, 김구는 장개석과 면담을 통해 군사간부 양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을 약속 받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하여 1934년 2월 92명의 한인 청년들이 입교하면서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개설되었다. 선생도 이때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였는데, 그것은 노백린 장군을 닮아 무인적 기질이 충만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선친의 유지를 계승하여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 2지대 사진그러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김구와 이청천 사이의 알력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감정 대립이 발생하였고, 특히 일제의 강력한 지원 중지와 폐쇄 압력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폐쇄되자, 김구는 자신을 추종하던 학생들을 1934년 8월 남경에 있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선생도 김구의 아들 김인·안중근의 조카 안춘생 등과 함께 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들이었다.


# 군사특파단에 들어가 임정의 광복군 편성 실행


중국 장사(長沙) 3.1절 유흥조 전체 연원기념(1938)선생을 비롯한 이들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군에서 근무하면서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강력한 항일전의 수행을 위해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는 군사간부의 양성과 함께 한인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지역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군사특파단 파견이었다. 군사특파단 파견은 임정이 1939년 기강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해 11월 조성환을 단장으로 황학수·나태섭·이준식 등과 청년공작원 노복선·서파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이 서안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은 화북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20여 만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서안판사처 직원 일동서안에 도착한 군사특파단은 서안성에 판사처(현지 사무소)를 설치한 뒤,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 장교들에게 광복군 참여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에서 제대한 인원들을 군사특파단에 참여시켰다. 그리하여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선생과 안춘생·조인제 등도 이때 군사특파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생이 참여한 군사특파단의 주요 임무는 서안에 군사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화북지역 한인교포들을 대상으로 선전 초모 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선생을 비롯한 안춘생·김광·서파·이영여 등 군사특파단원들은 1940년 6월 본격적인 공작활동에 들어갔다. 즉 이들은 중국군 제2전구 사령관 염석산의 협조를 받아, 관할 구역인 산서성 임분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 “광복군 자원자를 끌어 모아라.” 광복군 병력을 확대


이들의 활동은 1940년 11월 서안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선생을 비롯한 군사특파단의 활동은 광복군을 창설하는 실질적인 준비작업이자, 광복군의 활동기반을 개척한 것이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총사령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곧 지대 편성에 들어갔다. 지대 편성은 그 해 11월 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지대는 총사령부에 직속된 예하 단위부대로 편성되었다. 총사령부에서 원래 제1·제2·제3지대로 편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5지대가 됨으로써 4개 지대가 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단위부대로 4개 지대의 편제를 갖추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군사특파단원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제1지대에 편성되었는데, 지대장은 이준식이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동창인 안춘생·조인제 등과 함께 중국군을 나와 제1지대의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우선 선생은 지대장 이준식을 비롯한 제1지대 간부들과 함께 1941년 3월 산서성 지역으로 가서 병력 확대를 위한 초모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초모 활동은 1942년 4월 지대의 개편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은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행동9개 준승]을 계기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으로 인해 지대의 전면적인 개편과 조정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4개 지대는 모두 해체되고, 제1·제2·제3지대로 새롭게 짜여졌다. 우선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계기로 개편되었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화북 진출이 있은 뒤, 중국군사위원회는 잔류 대원들을 광복군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총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이 되었다. 제1지대는 지대본부와 2개구대(區隊)로 편제되었는데, 지대본부는 중경에, 호북성 노하구와 절강성 금화에 각각의 구대를 설치하였다. 제1지대는 편제상 중경 지대본부를 비롯하여 2개의 구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구대는 3개의 분대를 가지고 있었다. 대원수는 지대본부 42명, 제1구대 27명, 제2구대 23명 모두 92명 정도였다.


# 일본군 탈출한 조선인 학도병들, 중국 내 광복군 찾아와


제2지대는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한다는 결정이 난 뒤, 종전의 제1·제2·제5지대를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들은 1939년말 이래 서안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세력들이었다. 때문에 지대본부와 3개 구대가 모두 서안시 두곡에 주둔하였다. 총사령부 참모장 이범석과 참모 이복원이 지대장과 부지대장을, 그리고 제1지대 간부였던 선생은 제2구대장, 안춘생은 제1구대장, 노복선은 제3구대장을 맡았다. 성립시 제2지대 대원은 대략 80여명 정도였다. 제2지대는 중경에 머물러 있던 이범석이 1942년 10월 취임하면서 지휘체제가 확립되었다. 선생을 비롯 제2지대 간부들과 대원들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산서성 일대 하남성·하북성 지역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초모한 인원들을 중국군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의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제7분교에서 훈련시켜 공작원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5월경 제2지대 병력은 250여명으로 늘어났다.


광복군 2지대 사진제3지대는 안휘성 부양의 징모분처가 발전하여 성립된 것이다. 징모분처는 1942년 2월에 제3지대장인 김학규를 주임으로 오광심·신송식 등 8명으로 편성되어, 안휘성 부양을 거점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부터 초모공작의 성과가 나타나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이 지하공작대원을 통해, 또는 중국군 유격대의 협조와 안내로 부양에 집결하였다. 그 숫자는 1944년 9월경 기간요원을 포함하여 약 70여명이었다. 이들은 임천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에 설치한 한국광복군 훈련반(한광반)에서 교육하여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 미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하는 항일전선 구축


제2지대 제2구대장인 선생은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합동 작전에도 동참하였다. OSS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되어 정보수집·유격대활동·적후방교란 등을 임무로 하던 일종의 전략첩보기구였다. 이는 1944년 10월 웨드마이어 중장이 중국전구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운남성 곤명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OSS와 광복군이 합작을 이루게 된 것은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에서는 전략상 한반도를 중시하고 있었다. 한반도가 '일본과 중국대륙간의 수송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한반도는 '비밀첩보원들이 일본으로 침투하는 기지'로 중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OSS에서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중요시하게 되면서, 이 지역에서의 첩보활동에 한국인들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OSS측은 미주 한인동포와 미군에 포로가 된 한국인,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1945년 OSS에서는 이들을 활용하기 위한 세 가지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냅코작전'(The Napko Project)으로, 미국 본토 및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미주 한인동포들과 맥코이(McCoy)수용소에 있는 한국인 포로들을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또 하나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이다. 중국 관내의 한인들, 그 가운데서도 한국광복군을 활용하자는 계획이었다. 광복군도 OSS와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1944년 8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 활동을 규제하고 있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취소하여 통수권을 임시정부가 장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광복군의 주요한 전략은 연합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한 것, 그리고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한 것 등이 그러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군 측이 OSS와 연계하려는 시도는 두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선생이 소속한 제2지대와 제3지대가 각각 독자적으로 OSS와 교섭을 추진한 것이다. 제2지대장 이범석은 미군 제14항공대의 쉬노우더 장군에게, 제2지대가 미군의 항공활동과 첩보활동을 돕겠다고 제의하였다. 그에 따라 OSS의 칼튼 크라이드 대위가 연락관으로 양측의 교섭을 담당하여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이범석은 OSS 대표에게 광복군을 미군 내에 근무하도록 할 것, 전략첩보 수집과 한국에서 연합군 작전을 위해 광복군에 대한 훈련을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조국 진공을 위한 독수리 작전에 뛰어든다!”


이와 함께 안휘성 부양에 있던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이 OSS와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1945년 정월 임천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있던 김우전과 임천 근방의 사만에 주둔하고 있던 OSS통신대 버치(John M. Birch) 대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사이에 광복군의 무전교육 문제가 거론되었고, 보고를 받은 김학규는 그 해 3월 김우전과 버치를 대동하고 OSS본부가 있는 곤명으로 갔다. 여기서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 첸놀트(C. L. Chennault)를 비롯한 각 부서 책임자들과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함으로써 군사합작 계획이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최종 승인을 거쳐 광복군과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OSS가 '독수리작전'을 매개로 합작을 이루게 된 것이다.


광복군과 미군이 합작으로 '독수리작전'을 실행함에 따라 선생을 비롯한 제2지대 대원들의 OSS훈련이 실시되었다. 제2지대의 OSS훈련은 합작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월 이범석의 초청으로 미군 싸전트 대위가 서안의 제2지대를 방문한 것이 그러한 준비작업이었다. 이때 OSS측에서는 제2지대 대원들의 사기·능력·단결심 등을 조사하였고, 이들이 OSS훈련과 작전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김구 주석의 최종 승인과 함께 훈련 대상 인원에 대한 선발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선생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이와 함께 싸전트는 이청천·이범석·김학규 등과 함께 4월 3일 안휘성 임천에서 한광반 교육을 받고 중경 토교에 머물고 있던 한인청년들을 방문하였다. 이들을 만난 싸전트는 "군사집단으로 내가 본 가장 지적인 집단이고, 나의 생각으로는 미군 청년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고 이들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이범석에게 "이들 전체를 두곡으로 데리고 가서 독수리 작전 훈련에 참여시킬 것"을 제안한 것이다. 서안에 있던 제2지대 대원들 중 선생 등 31명과 한광반 출신 19명이 선발되어 OSS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광복군 2지대 사진OSS훈련에 대한 모든 준비는 미국측에서 담당하였고, 훈련책임자는 싸전트 대위였다. 선생을 비롯한 OSS훈련 요원들은 1주 예비훈련 후, 정규훈련에 들어갔다. 정규훈련은 첩보훈련반과 통신반(무전교신반)으로 나눠 5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훈련은 학과교육과 야전훈련으로 구분되어 단계별로 이루어졌다. 학과교육은 무전통신과 독도법을 비롯하여 첩보와 작전 과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과교육을 거친 후 야전훈련이 실시되었다. 야전훈련은 사격술·폭파술·도강술을 비롯하여 유격전에 필요한 특수훈련과 통신반의 현장훈련으로 진행되었다.


예비훈련과 학과교육·야전훈련으로 이어진 OSS훈련은 첩보공작원을 만드는 특수훈련이었고, 이는 각 단계마다 시험을 치러 통과해야 하는 엄격한 훈련과정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약 3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제1기생들의 성적에 대해 OSS교관들이 만족함으로써 3개월 훈련이 완료되었다. 선생이 소속한 제2지대와 함께 제3지대에서도 동시에 OSS훈련이 실시되었다.


# 첩보 파괴 폭파 무선 사격을 하는 특수훈련에 참여


제3지대의 훈련은 곤명에 있는 OSS본부와 교섭하여 이루어졌다. 훈련장소는 미군 제14항공대 파견대가 주둔하고 있던 입황으로 결정되었고, 우선 제1기로 20명을 훈련시킨다는데 합의를 이루었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도 인원을 파견하여 제3지대의 OSS훈련을 지원하였다. 제3지대의 OSS훈련 역시 모든 준비는 미국측에서 담당하였다. 훈련장소는 입황의 오가점비행장 근처 미군막사를 이용하였고, 인도에서 활동하던 윔쓰(Weems) 대위를 책임자로 5명의 교관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훈련내용은 기상·첩보·파괴·폭파·무선통신·사격 등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과 미군이 합작하여 추진한 '독수리작전'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특수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 등 제1기생들이 훈련을 마치면서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킨다는 국내 진공작전 계획이 추진되었다. 제2지대에서 실시한 선생을 비롯한 제1기생의 OSS훈련이 끝나자, 8월 5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총사령 이청천과 선전부장 엄항섭 등 19명과 함께 서안에 도착하였다. 미국측과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의 국내 침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회의는 8월 7일 제2지대 본부에서 개최되었고, 한국측에서는 김구 주석·이청천 사령관·이범석 제2지대장, 미국측에서는 중국 OSS 총책임자인 도노반 소장과 홀리웰(Holliwell) 대령, OSS훈련책임자 싸전트 대위 등이 참가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이 때 도노반 소장은 "금일 금시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되었다"라고 하여 한·미간에 공동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그 형태는 OSS훈련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광복군 대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후방 공작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광복군측에서는 도단위로 활동구역을 정하여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였다. 국내정진군은 총지휘 이범석 장군 밑에, 평안도반·황해도반·경기도반을 지휘하는 제1지구대, 충청도반·전라도반을 지휘하는 제2지구대, 함경도반·강원도반·경상도반을 지휘하는 제3지구대로 되어 있었다. 선생은 제2지구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에 대비하였다.


# “미군 잠수함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거점을 마련한다.”


선생을 비롯한 국내정진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세 단계로 계획되었다. 우선은 광복군 대원들을 미국 잠수함으로 국내 침투시킨다는 것이고, 다음은 이들로 하여금 국내에 거점을 마련하여 부여된 각종 공작과 인심을 선동하는 것이며, 셋째는 OSS측과 연락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적후방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은 연속적으로 추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광복군의 국내진입을 가로막고 말았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국내정진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실행되기 직전 좌절되고 말았다.


노태준 선생의 장례식# 일본 항복으로 조국 진공 작전은 무위로 돌아가고…


광복 이후 선생은 임정 요인들이 모두 귀환한 뒤인 1946년 6월 3일 500여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귀환 직후 선생은 좌우의 극한 대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범석·안춘생 등 광복군 동지들과 1946년 10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운 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민족국가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범석 장군의 비서실장을 맡아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을 후원하였다.


이후에는 <한국일보>의 전신인 <태양신문>을 창간하여 혼란기의 민주언론 육성에도 노력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70년 2월 26일,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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