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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75] 의병 거목 31세의 나이에 쓰러진 '신돌석'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6-15 07: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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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신돌석, 1878 ~1908, 대통령장 (1962)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하네/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문뜩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 1905년 선생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 -


#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반일 의식 성장


신돌석(申乭石, 1878. 11. 3∼1908. 11. 18) 선생은 1878년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순경(舜卿)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이필제 난의 중심지였다. 1870년부터 약 1년 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이 난은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反)봉건 농민운동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이 유독 드높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선생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선생 대에 와서는 평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던 시기였고, 또 성장하던 시기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 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러한 반일 민족의식은 성장과정에서의 교육과 교류관계를 통하여 더욱 증폭되어 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기와 담력이 출중하였고, 평민신분이었지만 부친의 지도와 격려 아래 일찍이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그리하여 15세가 되자 선생은 정세를 파악하고, 뜻을 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지사, 명인들을 찾아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그를 빌미로 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반일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 강대국 이권 싸움에 휘말린 조선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이즈음 세력 만회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공사관과 일본 거류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 해 5월 7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민씨정권의 원병요청으로 5월 5일 이미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던 청나라와 일제의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한반도가 청·일 양국 군대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정부측은 5월 8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군대 파병의 빌미를 제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내정개선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이를 명분으로 6월 21일 경복궁 쿠데타(갑오왜란)를 자행하여 친정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 갑오내각을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3일 아산만 풍도해안에 정박 중인 청나라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후 일제는 성환전투와 평양전투 등에서 청군을 연파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3월 23일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일제는 청나라에게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개항 이후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벌여오던 각축전에서 일단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뿐이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 받게 되면, 그 영향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앞지르게 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알려진 이들의 압력으로 일제는 결국 요동반도에 대한 할양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전개되어가자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실각한 민씨정권의 핵심인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함으로써 재집권의 기회를 노렸다. 즉 이이제이 전략을 구상한 것이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매개로 진행된 이 계획이 크게 당황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였다.


# 명성황후 시해로 민족 분노 폭발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요동반도의 할양권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비등하였는데, 한국에서조차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날이면 정부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획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이었다. 1895년 8월 20일 일제는 일본인 무뢰배들을 동원하여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뒤, 그 시신마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만행은 우리 민족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럼에도 일제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8도를 23부로 바꾼 뒤 친일파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양력 사용과 단발령을 강요하면서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선생의 생가# 경북 영해 의진 중군장으로 활동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동안 사귀어온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선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를 거쳐 이 해 7월 초 영덕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이들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즉 7월 5일 선생의 영해 의진은 김하락 의진과 연합하고, 7월 9일 유시연의 안동 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연합 의진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 연합 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관아를 공격해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하였으므로, 선생과 김하락 의병장 등은 연합 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김하락 의병장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역량을 키워갔다. 이후 선생은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로 지사, 의사 등을 찾아 다니며 구국 방안을 논의하고 재기 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이 가운데는 허위의 제자로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박상진,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군대해산 직후 원주 진위대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하였던 민긍호 등이 있었다.


#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 영릉 의병장으로 의거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점점 더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1906년 3월 13일 선생은 향리인 영해 북평리에서 아우인 신우경과 함께 활빈당으로 활동하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모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 때 영릉의병장이라 쓴 기치를 앞세우고 의병항전을 시작하였고, 선생의 부친은 전답 등 가산을 처분하여 무기와 군량을 구입하는 등 의병활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하였다.


선생의 유적지선생은 거병 직후 영해 군대동에 주둔하면서 우선 의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부근의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웠다. 이에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많은 청장년들이 몰려와 의병에 투신하였으므로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고 사기는 충천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선생은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 9척을 격침시켰다. 또한 6월에는 1,0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평해 부근에서 대구 진위대 및 원주 진위대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 동해안 일대, 영양, 청송, 의성, 봉화 등 경북 내륙지방, 정선, 원주 등 강원도 내륙지방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선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11월에는 경북 일월산, 백암산, 대돈산, 등대산 등지로 남하하여 활동하였고, 또 문경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1일 선생의 의병부대와 이강년 의병부대는 연합하여 순흥을 공략한 뒤, 그 소식을 듣고 대구로부터 일본군 지원부대가 진격해 오자 즉시 울진방면으로 후퇴하는 등 신출귀몰한 무력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또한 이듬해인 1907년 봄에는 중군장 백남수와 김치헌 등 용맹한 휘하 장병들과 함께 영덕 일대의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진회 등 친일 세력들을 대거 처단하여 그 기세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8월 20일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경북 영양읍을 공격하여 일본군 헌병분파소와 관아를 소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선생은 경북 영양과 문경, 그리고 영해와 평해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후치다, 기쿠치 대위 등이 인솔하는 일본군토벌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 민중의 의병전쟁 참여의 기폭제


평민의병장으로서 선생의 이러한 신출귀몰한 명성과 전과는 일반 농민들의 항일 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을 한층 고양시켜 갔고, 또한 이후 평민의병장들이 대거 출현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따라서 선생의 활약은 이 해 8월 대한제국의 중앙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강제 해산에 따른 해산 군인의 의병 대열 합류와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민전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申乭石 部隊 활동에 대한 寧海警務分署 보고선생의 명성은 영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전국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평민의 처지였지만 선생은 이 해 11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 양반 유림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의 연합부대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할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저지와 방해로 이에 합류하지는 못하고 영남일대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 의병을 소부대 단위로 편성, 유격전 수행


1907년 말 경북 일월산 등지에서 휴식하며 전력을 보충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안동의 유시연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영남지역의 의병항전을 주도하여 갔다. 이 시기 선생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부대 단위로 편성하여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는 강화된 일본군의 추격작전을 피하고, 수시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술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 같은 전술 변화가 효과를 발휘하여 일본군은 선생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군경 분파소를 설치하지 못하였고, 정찰활동도 낮에만 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상주의 일본군 수비대장 야마다 소좌는 일월산 지역에 주둔한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고 대규모의 탄압작전을 벌였다. 즉 이 해 2월 15일부터 영주, 예천, 함창, 상주, 안동의 일본군수비대에서 차출한 120여 명의 병력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선생은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눠 산간 벽지로 산개시킨 뒤, 유격전으로 대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진압작전에 실패한 일제는 선생의 의병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대해,


“폭도들(신돌석 의병부대)은 소군으로 분산하여 은닉하고 있으므로 토벌대는 용이하게 수색단서를 얻지 못하고 활동지역 안의 각 촌락만을 면밀하게 수색하였다. 그는(신돌석) 실로 출몰이 자유 자재하여 용이하게 체포할 수가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이처럼 선생의 의병부대에 대한 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는 선생을 회유하기 위한 수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경상북도 관찰사의 서약서, 통감의 편지 등을 보내 귀순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선생의 불 같은 항전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귀순 권유서를 불살라 버리고 신명이 다할 때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의병 거목, 31세의 나이에 쓰러지다


그에 따라 선생은 의진을 이끌고 9월 영해 희암에서, 10월 영양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영해와 평해를 중심으로 흥안, 울진, 삼척 등 동해안 일대와 안동, 영양 등 경북 내륙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겨울이 다가오자 선생은 그동안의 전력 손실을 보충하여 다음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선생은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명년의 재기를 위해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 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선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 선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선생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선생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자신보다도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사진-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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