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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1] 이살설 등과 헤이그에 특파됐다가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한 '이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2 11: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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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준 李儁, 1859.01.21 ~1907.07.14. 함경남도 북청, 대한민국장 1962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선생의 유훈 중에서-


#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다


이준(李儁, 1859. 1. 21 ~ 1907. 7. 14) 선생은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 공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졸지에 고아가 됐으나,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해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했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했고,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했다.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 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하고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 가두연설 등 맹활약을 하게 된다.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동경 조도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비정탄핵(秕政彈劾) 등의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하였다가 이승만, 이동녕 등 17인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2년 선생은 효율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폐하다


헤이그 특사들 사진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상설, 송수만, 원세성 등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조직, 격렬한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 이상재와 함께 연설과 웅변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의 성격을 띤 대한협동회를 조직, 그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은 선생이, 총무는 정운복, 평의장은 이상재, 선무부장은 이동휘, 편집부장은 이승만,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위 등이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8월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 분자들로 하여금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12월 12일 선생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열사는 회장으로서 반(反)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황해도 황주 철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동년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소위 을사오조약의 늑결을 강행하였다는 것, 이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고 중국 상해에서 즉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을사조약에 대한 폐기를 상소하는 운동을 펼치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기울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3월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선생은 이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안창호, 김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준열사기념관 사진#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헤이그에 특파되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선생은 주위 도움을 받고 비밀리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다.


선생보다 먼저 출발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러시아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여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만났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전이 박탈당하였으나 세계정세를 관망하기 위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다. 한편 선생은 1907년 4월 22일 가족들과의 고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울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으며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6월 4일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한 선생과 이상설은 이범진, 이위종을 만나 그간의 경과에 대하여 토론하며 [장서]의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번역한 후 6월 19일 그곳을 출발하여 독일 베를린에 들려 [장서]를 인쇄하고 동월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De 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다.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Nelidov)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아 거절당하고 말았다.


캠프폴리 스트라트 2A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묘적.#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다. 당시 참가국은 46개국이고 대표는 약 247명이었다. 이상설을 비롯한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 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이위종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선생은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 55년만에 밟은 고국의 땅


선생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을 윤병구 목사와 선생의 동생인 이운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인 동년 9월 5일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75센트를 지불하고 Nieuw Eiken Duinen 묘지를 영구 사용의 계약을 하고 다음 날인 9월 6일 장례식을 치렀다. 열사의 장례에 대하여 당시 <학세 쿠란트(Haggsche courant)> 7522호의 기사에 의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유해는 에이켄무이넬에 완전히 매장되었다. 장례식에는 한국 대표 단 두 사람과 YMCA의 회장 매케이 남작이 참례했다. 이상설은 이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가셨다’고 슬픈 조상을 했다.” <학세 쿠란트(7522호)>


동년 8월 9일 일제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을 하여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선생은 종범으로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에 조국의 품 안으로 모셔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하였다. 1964년에는 서울 장충단 공원에 열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헤이그 묘소에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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