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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1] ‘13도 창의대진소’로 편성하고 총대장 추대된 '이인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1 00:48:09
  • 수정 2022-12-01 00: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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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인영 李麟榮, 1868.09.23 ~1909.09.20. 경기도 여주, 대통령장 1962


이인영(李麟榮, 1868. 9. 23 ~ 1909. 9. 20)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여주에서 거의했고 1907년 7월 이은찬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대장이 돼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에 걸쳐 항전했다. 서울탈환을 위해 ‘13도 창의대진소’로 편성하고 총대장에 추대됐었으나 일경에 피체돼 순국하신 선생은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조국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잘못과 광란을 전세계에 호소해야 한다‘고 외치셨다.


# 학식 높은 선비에서 의병 총지휘자로


선생은 1868년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부친 이현상(李顯商)과 모친 한씨(韓氏)의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해 마지 않았다. 선생은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암 유인석, 운강 이강년 등과 함께 복수키로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백여 명을 규합해 춘천과 양구 등지에서 일군과 싸웠다. 1896년 여름, 의병 해산령이 내리자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의진을 해산하고 경북 문경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 뒤 광무황제를 폐위하는 등의 행동을 계속 자행하게 되자, 해산된 군인들까지 의병에 합세해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때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2천여 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 선생을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와 간곡히 권유했으나 선생은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


이에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자자로서 공사를 미루리오”라 말하면서 나흘 동안 유숙하면서 선생의 결단을 촉구했다고 한다. 1907년 7월 25일 마침내 선생이 이를 허락해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즉시 원주로 가서 의병 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이 됐다. 선생은 곧 곳곳에 격문을 보내어 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 조국의 국권을 찾자고 호소했고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통문을 보냈다. 특히 ‘고재상항동포(告在桑港同胞)’라고 쓰여진 격문은 1908년 3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고 한다. 국내외에 배포된 격문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구국의지를 고조시켰고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 격문에 감동해 의병에 참가함으로써 그 수가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교전했다.


# 13도 연합의병 총대장으로 서울진공 시도


선생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일군과 싸운다 해도 일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은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해 통일된 지휘아래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했고 이어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로 총대장이 됐다. 흩어진 조직을 재정비해 관동군 6천여 명과 진동군 2천여 명을 중심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했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13도 총대장 이인영(李麟榮)


군사장 허위(許蔿)


관동군(강원)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호서군(충청)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호남군(전라) 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교남군(영남) 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진동군(황해) 창의대장 권의희(權義熙)

관서군(평안)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군(함경)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李麟榮の檄文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영(令)을 내리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 명을 선발했다. 선생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 서울에 가서 이를 인쇄토록 지시했다. 인쇄된 격문은 김세영이 직접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필사의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승총으로는 패전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는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무기 및 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부친 사망소식까지 접하다


이인영 판결문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인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선생은 병으로 위중했을 때 간병 하지 못한 일,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일,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면서 자책한 후 허위 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는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 42세 때 황간에서 피체되어 순국


선생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을 때 후임 의병 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됐는데 일군이 산을 태워 공격하는 화공(火攻)작전으로 나와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됐다. 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 공략의 계획은 이로써 무산돼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시영(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때는 경북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3년상이 끝나는 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일군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국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李麟榮の遺書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日王)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받아 동년 9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시니 향년 42세였다.


정부에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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