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 기자]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지금은 그 앞으로 세종로가 뻗어 있어 정면에서 통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지만 한때는 국왕과 문무대신이 수도 없이 드나들어 정문의 기능을 충실히 담당했던 곳이다.
광화문이란 이름은 경복궁이 창건될 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다. 1395년(태조 4) 태조는 정도전에게 완성된 경복궁의 사대문 이름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자, 이에 따라 동문을 건춘, 서문을 영추, 북문을 신무, 그리고 남문, 즉 정문을 오문(午門)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리 오래 사용되지 못하고 세종 때 광화문이라 바뀌어 오늘날까지 줄곧 그렇게 불리고 있다.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을 낸 높은 석축 위에 문루를 올렸는데, 조선시대의 궁궐 가운데 이렇게 세워진 것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숭례문의 석축과 수법이 비슷하지만 중앙뿐 아니라 좌우에 하나씩 무지개문을 더 낸 것이 다르고, 가장 큰 가운데 문으로는 국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신하들이 드나들도록 했다. 광화문에 이어진 담장의 동쪽과 서쪽의 끝에는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솟아 있어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됐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 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시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했다./사진-이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