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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을 짓밟는 것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라"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1-04 17:32:17
  • 수정 2021-11-04 17: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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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를 사랑한 선각자 '안중근(1)


[이승준 기자] 평화를 바라지 않는 있을까? 하얼빈의거는 오로지 힘이 지배하던 세상에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그가 쏘아 올린 세 발이 총성은 강자의 탐욕에 대한 경고이자., 평화를 향하는 눈부신 신호탄이었다. 약자를 지키고자 한 의사의 의지와 세계 평화 실현을 위한 그의 염원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힘차게 메아리치고 있다. 


"옳은 일을 짓밟는 것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동맹과 일제의 식민통치, 풍전등화와 같은 대한제국의 위기 속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정의를 부르짖었던 안중근의사의 정신인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안중근의사,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한국의 외교관을 탈취하자 한반도에서는 '국건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됐다. 전통 유생들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가가 멸망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를 불문하고 '즉각 결전'을 통해 '즉시 독립'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투쟁을 주도했다. 한편 근대 지식인들은 "실력이 부족해 국권의 일부를 상실했기에 지식과 경제 등 실력의 양성이 국권회복의 길"이라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실력양성운동, 즉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세의 안중근의사는 일본이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싸운다는 신전을 믿었기 때문에 개전 당시 러.일 전쟁으로 '의전(義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일전쟁과 동시에 일본이 한국을 침공하고 을사조약을 강제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그는 일본의 침략행위가 러시아보다 더 악랄하다고 생각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 의사는 항일의병으로는 막강한 일본군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청국의 산동과 상해로 건너가 한국인 유력자에게 항일투쟁을 권유했다. 그러나 한국인 유력자들은 냉담했고 호응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상해 천주교성당 앞에서 한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프랑스인 르각 신부를 만났다. 



르각 신부는 안 의사의 항일운동 계획을 듣고, 프랑스의 애국지사들이 알자스와 로렌 두 지역을 비웠다가 결국 그 두 지역을 독일에게 빼앗긴 역사적 사실로 예오 들며,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비우지 말고 국내에서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안 의사는 르각 신부의 권고에 공감해 실력양성운동을 결심하고 귀국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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