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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89] 만해 한용운의 말년을 보냈던 집 '심우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18 20:08:42
  • 수정 2024-04-02 06: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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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렬했던 항일운동의 한 복판에서(1)


[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 '심우장은 사적 제550호이다.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됐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으로,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했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도송'이란 깨달음에 이른 순간 위대한 선사들이 남기는 시를 말합니다.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깨달음에 이른 순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오도송을 밝하고자 합니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 대장부는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어야 하는데 

幾人長在客愁中 아직도 몇 사람은 오래도록 손님의 시름 속에 머물고 있네 

一聲喝破界 단말마의 할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온 세상을 열어젖히니

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숭아 꽃이 흐드러지게 날아다니는구나



1917년 12월3일 10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한용운에게 일어났던 깨달음이다. 한용운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는 오세암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 행과 두 번째 행은 참선하고 있을 때의 한용운의 내면이 그림처럼 묘사돼 있다. 첫 행을 통해 한용운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라는 임제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있음을 확연하게 알 수가 있다.


두 번째 행은 임제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당시 한용운은 아직도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손님의 상태에 머무르면서 아직도 몇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향수까지 내포하고 있다.그 순간 그는 모든 상념을 끊고 오세암의 주인 즉,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된다. 


깨달음의 순간과 그 풍경을 노래하는 세 번째연과 네 번째 연을 보면 12월은 복숭아꽃이 필 리 만무한다. 복숭아꽃은 춘삼월에 피는 꽃이건만 한용운은 보고 있던 휘날리는 복숭아 꽃은 달빛을 머금고 있는 눈송이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춘삼월을 물들이는 복숭아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상념을 자아냈던 몇몇 사람들이 그의 뇌리에서 완전히 떠나고 있는 내면 풍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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