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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塔坪里七層石塔]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7-29 02:30:56
  • 수정 2023-12-21 13: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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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측면전경 [이승준 기자]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6호.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다. 


중앙탑과 관련해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해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기단부 

중앙탑면에 있는 지명 중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다. 여기서 반내[半川]라고 하는 것은 남북 끝에서 반이되는 내라고 해서 반내라고 했다. 본래는 ‘한반내’였다. 이는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6년도의 조사에 의하면, 기단부의 일부가 파손돼 점차 기울어지고 있다. 심할 경우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해 다음 해에 이 석탑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됐다. 그런데 해체 도중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유물이 발견돼 현장에서 수습됐다.


탑신부의 제6층 탑신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편(書類片)과 동경(銅鏡) 2점, 목제칠합(木製漆盒),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 있는 합[靑銅製有蓋盒] 등이 나왔다.


그리고 탑신부에서 발견된 은제사리합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舍利甁)이 있고, 그 주변에 몇 개의 사리가 흩어져 있었고 사리병 안에도 몇 개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상의 유물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출현된 것이나 그 조성연대에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경 2점은 고려시대의 조성품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탑은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차 사리장치의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탑은 탑평리의 한강 중류 연안 폐사지의 높은 대지에 잘 보존돼 있다.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탑신부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하층기단 면석은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 3주가 정연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쪽 우주와 탱주 2주가 모각(模刻)됐고, 상층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돼 신라식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갑석 위에는 별개의 돌로 마련된 2단의 각형 받침대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도 하층부에서는 수매의 석재로 구성했고 상층부에 이르면서 1매의 석재로 건조했다. 각 층의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됐는데 초층은 우주가 별석으로 조성됐고 면석도 별석이고, 2매의 판석으로 조립됐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우주가 모각된 4매의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조립했거나 혹은 앞뒤 양면에만 양쪽 우주를 모각한 판석을 세우고 그 양쪽(좌우)에는 단순한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삼았다. 상층부인 6층과 7층의 탑신석은 1석으로 조성했다.


옥개석은 초층이 낙수면부와 처마 밑의 옥개받침부가 도합 8석으로 조립돼 있다.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낙수면부와 옥개받침부가 1석으로 돼 전체가 2석으로 조립됐고, 6층과 7층에 이르러서는 1석으로 됐다.


상륜부앙화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추녀가 수평이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反轉)도 잘 표현돼 대규모의 석탑으로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에 장엄도 잘 갖췄던 당대의 유수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서 특이한 것은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구성했다. 


복발 측면에 한 줄의 띠를 돌리고 앙련(仰蓮)을 조각한 앙화석을 얹은 것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상륜양식이라 하겠으나, 노반석 2석을 겹친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특수한 형식이라 하겠다.


이 노반석은 일반형과 같이 상단이 갑석형으로 되고 그 밑에 1단의 받침이 마련됐으나 그것이 신라시대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단면수직단층을 이루지 못하고 안으로 굽었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보수(補修)가 아닐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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