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사적지로 지정된 '명동대성당'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24 01:58:48
  • 수정 2023-12-21 13:03:42

기사수정

명동대성당/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천주교서울대교구주교좌명동대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으로,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 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사진-이승준 기자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사진-이승준 기자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같은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사형선고 받으심/사진-이승준 기자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 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한국 최초의 사제 순교자/사진-이승준 기자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 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다.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사진-이승준 기자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만에 완공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사진-이승준 기자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가,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천주 성자를 낳으신 동정녀시오. 우리의 모친이신 결백하신 마리아께 이 동굴과 바위들을 바치나이다.(1960년)/사진-이승준 기자

명동 성당 본당 입구/사진-이승준 기자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사진-이승준 기자 

개포동 본당 교우들이 브뤼기에르주교 현양을 위해 이 자리에 원 묘비와 동일한 묘비를 제작 안치했고, 2006년 9월 13일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를 축복했다. 


1835년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 마가가 묘소 앞의 묘비 축복

1960년대 문화대혁면 시절의 비신자들. 묘비를 옮겨 협동조합의 섬돌로 사용

2006년   개포동 본당 교우들 3월 5일에 원 묘비를 확인한 뒤 마가가 묘소 앞으로 옮겨 안              치. 서울대교구 염수정 주교. 5월14일에 묘비 축복 


서울평협 창립 50주년 기념 타임캡슐/사진-이승준 기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아 앞으로 설립 100주년을 지내게 될 후배들과 그 감회와 기쁨을 나누고자 이 타임캡슐을 마련했다. 교구장(염수정 추기경), 주교를 비롯한  평협 회장(22대 손병선)이 50년 후의 성직자, 수도자, 평시도들과 평협 회장에게 보내는 서한과 소장품, 그리고 한국평협 50년사, 공소사진첩, 50개의 묵주, 미사주, 현재의 화폐,사진과 동영상이 기록된  USB 등 66점의 평신도 역사를 담았다. 


건물지/사진-이승준 기자  
건물지는 동서방향으로긴 ‘-’자 평면형태로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 위에 정면 3.5칸,측면 1.5칸의 규모로 조성돼 있다. 건물지 내부는 중앙 2칸에 걸쳐서 온돌방을 구성했고, 그 동측 반 칸에 아궁이를 두어 부엌공간을 구성했으며, 서측 1칸은 별도로 북측에 함실아궁이를 둔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다. 구들시설은 기와편과 잡석, 벽돌 등으로 고래둑 및 고래막이를 만들어 4줄 그대로 조성했고 고래의 끝단에는 개자리를 깊게 조성하고 연도를 통해 굴뚝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중앙 2칸의 온돌방 남측 전면 퇴칸은 툇마루를 두었고, 그 앞에는 반 정도만 남아 있는 댓돌이 남아 있다. 


명동 성당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