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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역대 왕-왕비-추존된 왕-왕비의 신주 모신 유교사당 ‘종묘’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23 00:11:55
  • 수정 2023-12-21 13: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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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추향대제 팔일무, 


[이승준 기자]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 착공해 다음 해 9월 완공했다.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해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와 헌종때 증축해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 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해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고 그 후 계속 증축해 현재 16칸으로 됐다. 


종묘대제 봉행 전날/사진-문화재청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해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해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같은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고,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해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해설이 있는 종묘제례악/사진-문화재청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해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했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돼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됐다.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 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돼 있고,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 사직단의 전경/사진-문화재청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된다. 세종때 처음 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해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고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해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고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고,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고,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외대문(外大門)/사진-이승준 기자

외대문(外大門)은 세 칸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칸은 윗부분에 붉은 나무 화살이 일렬로 꽂혀있다. 나라에 중요한 장소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 홍살이 있는 중앙칸은 평소에는 닫혀져 있고 종묘제사를 지낼 때는 열어둔다. 일반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문을 열어둬 조상신을 집으로 모시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은 혼백으로 이뤄졌다고 믿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정신을 지배하는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육체를 지배하는 ‘백’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제사를 지낼 때면 이 혼백이 후손들을 보고자 이 문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여겼다. 


삼도(三道)/사진-이승준 기자

종묘 정문으로 들어서면 세 곳으로 나뉘어진 길로, 삼도를 볼 수 있다. 정문에서 바라봤을 때 가운데 높은 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신로라 하고, 신로 동쪽은 왕이 다니는 어로이다. 신로 서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일반 신하와 제사를 돕는 사람들은 삼도 옆으로 걸어 다녔다. 정문부터 시작된 신로는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정전과 영녕전의 정문까지 이어져 있고, 왕의 길인 어로는 임금이 제사 기간 동안 머무는 어재실로 향해 있다.


연지(蓮池)/사진-이승준 기자

종묘 안에는 작은 못인 연지가 세 군데 있다.이 연못은 그 중 하나인 중지이다. 중지는 네모난 못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섬이 있는 모양새로,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따라 만들어졌다. 못 가운데에 있는 둥근 섬이 하늘을 뜻하고, 네모난 모양의 못이 땅을 뜻한다. 하나는 광화문 앞에 있는 재앙을 막아주는 신성한 짐승 해태처럼, 물의 기운으로 불의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이었다. 실제로 화재가 났을 때도 많은 물을 이용해 불을 끌 수 있었다. 


망묘루(望廟樓)/사진-이승준 기자

외대문을 지나 오른쪽에 가장 처음 보이는 건물의 이름은 망묘루이다. 망묘루란 '종묘를 바라보는 누마루 집'을 뜻한다. 누마루는 보통 마루보다 다락처럼 높고, 세면이 개방돼 난간으로 둘러쌓여 있는 마루로,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주 잘 보이는 장소로 난간도 매우 아름답다. 종묘제사 전날 임금은 아름다운 망묘루에서 선대왕을 추모하곤 했다.그래서 이 건물에는 임금들이 선대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나 글이나 그림을 새긴 현판이 많이 걸려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공사관계로 자료사진 대체/사진-문화재청

종묘 망묘루 동쪽에는 고려 31대 공민왕을 모신 공민왕 신당이 있다.공민왕은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히 친원파를 제거하고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집사청(執事廳), 집사청은 종묘제례에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대기하던 곳이다./사진-문화재청 

향대청(香大廳)/사진-이승준 기자

향대청은 제향에서 올리는 향과 축문,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였으나, 종묘제사가 있을 때는 헌관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전에 기다리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은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친향이냐, 그렇지 않은 섭향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한 명의 제관이 모든 신실에 절을 올려야 해서 나중에는 무릎이 바닥에 너무 많이 부딪혀 피가 고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이승준 기자

어재실(御齋室)/사진-이승준 기자 

십이장복, 면복은 면류관과 곤복을 통칭하는 왕이나 황제의 예복으로구장복과 십이장복이 있다. 심이장복은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께서 국가 의식에 착용했다. 종묘의 어재실은 왕이 종묘제사 전날 미리 도착해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왕은 이곳에서 선조왕들을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바로 잡았다고 전했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금과 마찬가지로 제사 기간 동안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종묘 제사가 있기 7일 전부터 4일 전까지는 조문과 문병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고, 죄인을 처벌하지도 않았다.제사 3일 전부터는 오로지 종묘제사에 관련된 일만 할 수 있었다. 재계는 오로지 제사에만 몰입해야 조상신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재실(世子齋室), 세자재실에는 종묘제례 하루 전 왕과 함께 온 세자가 머물렀다. 왕과 마찬가지로 종묘제사 시기에 금지된 행위를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 오직 조상신에 대한 제사에만 집중했다./사진-이승준 기자

어목욕청(御沐浴廳), 어목욕청은 왕이나 세자가 제사 하루 전에 목욕하던 곳으로, 목욕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 제사를 준비했다.

판위(版位)/자료사진-문화재청 

판위는 종묘 정전과 동문 밖, 그리고 묘정 동북쪽에 특별하게 만든 자리로, 종묘제례 중 국왕과 왕세자가 자신의 순서를 준비하던 자리이다. 국왕의 자리인 전하판위와 세자의 자리인 세자판위가 있다. 궁궐에서는 중요 의식이 있을 때만 임시적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종묘는 제사를 위한 공간이었기에 제단이 영구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찬막단(饌幕壇)/사진-문화재청 

찬막단은 돌로 만든 단으로, 제사에 쓰일 제사음식을 검사하던 곳이다. 종묘제례는 국가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그 준비 과정을 살펴보았다. 영조임금 이전에는 제사를 관리하는 제관들이 이 일을 했으나 영조임금 대부터 직접 시행했다고 한다. 


수복방(守僕房), 정전을 관리하는 수복이 거처하던 건물이다. /사진-문화재청 

성생위(省牲位)/사진-문화재청 

성생위는 제사에 사용되는 소, 양,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종묘제사 전날 왕은 조상신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이곳에 찾아와 제사에 사용될 소, 돼지, 양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원래 종묘제사에서 세 번째로 술을 올리는 종헌관 이하가 검사를 했으나 영조임금 대부터는 직접 검사했다고 한다. 


전사청(典祀廳)/사진-문화재청 

전사청 건물은 'ㅁ'자형 모양이다.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던 곳으로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기도 했다.마당에는 제사음식을 장만할 때 사용했던 돌절구 4개와 제사 음식을 조리한 아궁이가 여전히 남아있다.


제정(祭井), 제사 음식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던 우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우물 주변으로 담장을 둘렀다./사진-이승준 기자

정전(正殿)동문(東門), 동문은 왕을 비롯한 종묘대제에 참여한 제관 및 왕실가족과 문무백관이 출입하는 문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정전(正殿), 공사 중으로 인해 자료사진/사진-문화재청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은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정전은 같은 모양의 신실 19실로 이뤄져 있다. 신실 제일 안쪽에는 조상신의 영혼이 깃든 신주가 있고, 그 앞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있으며, 양 옆으로 각 신실을 구분하는 주렴이 달려있다.정전 앞에는 넓은 월대가 조성됐는데 그 한 가운데로 조상신들이 다니는 신로(神路)가 놓여 있다. 정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한다. 이는 종묘 정전에 영구히 모셔질 ‘불천위’가 된 왕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추가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불천위는 왕이 세상을 떠난 후 4대가 지나면 신하들이 왕의 공덕을 평가해 정했다. 종묘 정전에는 열아홉 분의 왕 그리고 서른 분의 왕비까지 총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正殿)남문(南門)/사진-이승준 기자 

정전으로 통하는 문은 누가 그 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이 달랐다. 남문은 조상신이 출입하는 문으로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정전으로 통하는 문 중 제일 크다. 왕이 다니는 동문이 그 다음으로 크고, 악공과 신하들이 다니는 서문이 제일 작다.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는 조상과 후손, 주인과 하인 등 신분 간의 예절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건축물로 표현된 것이다.


공신당/사진-이승준 기자 공신당은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임금들의 신주가 모셔진 정전보다 그 신분이 낮아 월대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년상을 치른 왕의 신주가 정전에 모셔질 때, 후대 신하들이 그 왕을 모셨던 신하들을 평가했고, 그 중에서 공이 높은 신하가 공신당에 모셔졌다. 정전에 모셔진 왕이 불천위가 되면, 그 왕의 공신도 공신당에 영원히 모셔졌다. 그러나 왕이 불천위가 되지 못해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그를 모신 공신의 위패도 공신당에서 내와 신하의 후손들에 내려졌다.


칠사당(七祀堂)/사진-이승준 기자 

칠사당은 인간의 일생을 보살피는 일곱 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칠사당은 공신당보다 서열이 높기 때문에 서쪽에 위치한다. 봄에는사명(司命)과 사호(司戶)소신에게, 여름에는 사조(司窕) 소신에게, 가을에는국문(國門)과 공려(公蠣) 소신에게, 겨울에는국행(國行)과 중류(中霤)소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종묘제사 때 세 번째로 조상신에게 술을 올리는 아헌관이 이곳에도 함께 술을 올린다.


요대(燎臺), 요대는 제사 의식인 제향이 끝나고 조상에 올린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곳이다. 정전과 영녕전 모두 건물 서쪽 뒷면에 자리잡고 있다./사진-문화재청 

정전(正殿)서문(西門), 서문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출입하는 문이다./사진-문화재청 영녕전(永寧殿)/사진-이승준 기자

영녕전은 제사를 지낼 왕의 대수가 지난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먼 조상 또는 정전에 모시지 않아도 되는 신주를 따로 모시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정전에 신주를 모신 지 4대가 지난 후에 후대 신하들로부터 정전에 모셔질 불천위로 모셔지지 못하면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긴다. 건물은 정전에 비해 작지만 그 모양은 같다. 


영녕전(永寧殿)악공청(樂工廳) , 영녕전의 악공청도 정전 악공청과 마찬가지로 악공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건축 구조와 양식은 정전 악공청과 같다./사진-이승준 기자 정전(正殿)악공청(樂工廳)/사진-문화재청 정전의 악공청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제사 때 연주를 준비하면서 대기하던 곳이다. 정전과 영녕전 사이의 숲 속에 위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변형돼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 종묘 제사에는 왜 악이 사용되었을까? 조선에서는 예절과 음악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서로의 차이에 따른 예를 엄격히 지키면서, 딱딱한 예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악으로 다스려 조화로움을 찾았던 것이다. 종묘제례악의 순서는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처럼 연결돼 있다. 처음에는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 그 이후에는 선대왕의 올바른 정치를 칭송하는 내용, 그 이후에는 조상으로부터 복을 내려 받기를 기도하는 후손들의 마음이 잘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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