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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47] 6.10 독립만세운동 선창 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20 10:43:47
  • 수정 2024-04-02 02: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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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발생한 장소/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벌어진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는 종로 3가 단성사 앞 파조교에서 시작됐다. 


이날 돈화문 앞에서 홍릉 앞까지 2만 4천여 명의 인파가 길가에 늘어선 가운데 8시 30분 경 순종의 국장행렬이 단성사 앞 파조교 부근에 이르자 중앙고보생 30~40명이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천여 매를 살포했다. 이때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태극기를 흔드니 부근에 모여있던 군중들도 이에 동조했다.  


자료사진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동 부근에서 이병립.박하균 등 연희전문학생 50여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YMCA학관 학생 박주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부근에서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경 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규.이동환과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 ‘통동계’ 학생들이 각각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격문을 배포했다. 이날 만세시위로 현장에서 일제경찰에 의해 검거된 학생과 청년은 종로경찰서에 약 150명, 동대문경찰서에 약 50명, 본정경찰서에 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 1천여 명에 이르렀다.


‘통동계’는 6.10만세운동의 추진세력 가운데 학생과학연구회계(‘사직동계’)와는 별도의 학생세력을 지칭한다. 통동계의 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수행됐고, 또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못지않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 6·10만세 기념비그런데 이처럼 각기 별개로 추진된 학생과학연구회계(‘사직동계’)와 ‘통동계’의 학생독립운동은 서로 연락을 취하ㅁ면서 사전 조율을 한 정황을 찾아 볼 수 있다. 인산 당일 학생과학연구회계가 종로 단성사 앞에서 동대문 구간까지의 가두 투쟁을 맡고, ‘통동계’가 동대문 밖 동묘 일대를 분담한 것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5월 20일 이후 학생과학연구회계가 만세운동에 동참할 학생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거사 준비에 착수한 ‘통동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박용규, 이동환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중앙고보의 이선호를 통해 접촉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4월 28일에 송학선의 금호문 의거가 일어나자 항일적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면서 3.1운동 때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기대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통동계 학생들은 항일투쟁에 대한 결심을 굳혀갔고 그것을 민족적 사명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지를 모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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