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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잊지 않겠습니다 2]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04 22: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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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국립현충원, 육탄 10용사 현충비.장병묘역

[이승준 기자] 총 53개 묘역으로 조성된 장병 묘역은 창군 이래 여수.순천사건, 6.25전쟁, 대간첩작전, 베트남(월남)전쟁 등에서 한 몸을 바쳐 싸우다 산화한 분들이 안장된 곳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에는 사병(부사관 포함), 대령 이하 장교, 군무원 및 종군자, 재일학도의용군, 파월장병, 육탄10용사 등 총 5만 2,954위가 안장돼 있다. (2018년 11월 말 기준)


# 육탄 10용사 현충비



육탄 10용사 현충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토치카를 폭파한 10용사의 명복을 빌고 추모하면서 그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과 일반 유지 등이 국방부의 지원으로 1955년 4월에 준공하고 5월 4일 제막했다. 


6.25전쟁 이전인 1949년 5월 3일 , 북한군이 개성 송악산 지역의 우리 측 고지를 기습 점령하자, 이튿날인 5월 4일 당시 육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0명의 용사가 고지를 되찾기 위해 폭탄을 몸에 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 장렬하게 산화했고, 6번 묘역의 제일 앞줄에 안장됐다. 


육탄 10용사 현충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와 하단 2,3m이며, 한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형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영문표기와 육탄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육탄 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육탄 10용사는 서부덕 소위, 황금재 상사, 윤승원 상사, 김종해 상사, 육옥춘 상사, 이희복 상사, 오제룡 상사, 박창근 상사, 박평서 상사, 양용순 상사)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 장병묘역


[이승준 기자] 총 53개 묘역으로 조성된 장병 묘역은 창군 이래 여수.순천사건, 6.25전쟁, 대간첩작전, 베트남(월남)전쟁 등에서 한 몸을 바쳐 싸우다 산화한 분들이 안장된 곳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에는 사병(부사관 포함), 대령 이하 장교, 군무원 및 종군자, 재일학도의용군, 파월장병, 육탄10용사 등 총 5만 2,954위가 안장돼 있다. (2018년 11월 말 기준)



# 육탄 10용사 현충비


육탄 10용사 현충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토치카를 폭파한 10용사의 명복을 빌고 추모하면서 그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과 일반 유지 등이 국방부의 지원으로 1955년 4월에 준공하고 5월 4일 제막했다. 


6.25전쟁 이전인 1949년 5월 3일 , 북한군이 개성 송악산 지역의 우리 측 고지를 기습 점령하자, 이튿날인 5월 4일 당시 육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0명의 용사가 고지를 되찾기 위해 폭탄을 몸에 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 장렬하게 산화했고, 6번 묘역의 제일 앞줄에 안장됐다. 


육탄 10용사 현충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와 하단 2,3m이며, 한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형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영문표기와 육탄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육탄 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육탄 10용사는 서부덕 소위, 황금재 상사, 윤승원 상사, 김종해 상사, 육옥춘 상사, 이희복 상사, 오제룡 상사, 박창근 상사, 박평서 상사, 양용순 상사)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 장병묘역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실제로 총 56곳의 장병묘역이 조성돼 있으나 그 가운데 5번, 8번, 9번 묘역과 7번 묘역에 주로 경찰관이 안장돼 있어 이를 경찰관 묘역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53개 묘역을 장병 묘역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6.25전쟁 이전의 무장공비 및 빨치산 토벌 작전이나 여순사건 때 전사자와 6.25전쟁 전사자, 베트남(월남)전쟁 참전 전사자 등이 장병 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초 안장자는 1957년 4월 2일 11번 묘역에 안장된 육군 하사 강덕수 등 184위이다.


이곳 장병 묘역에는 6.25전쟁 영웅인 백마고지 3총사 중 오규봉 일병, 월남전쟁 파병 훈련 도중에 부하를 구하고 순직한 강재구 소령,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으로 공군 조종사가 된 박두원 대위, 낙하훈련 중 부하를 구한 이원등 상사, 아버지 박명렬 소령과 같은 곳에 안장된 박인철 대위, 60년 만에 동생의 유해가 발견돼 형제가 나란히 안장된 이만우 하사와 이천우 이등중사, 국립묘지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 없는 묘비(김수영 육군 소위, 이후 호국전우의 묘), 종군기자로 베트남(월남)전쟁에서 사망한 유일한 한국인 기자 백광남, 6.25전쟁 당시 미군 24사단장 월리엄 F.딘 장군 구출작전에 자원했다가 순직한 철도기관사 김재현, 베트남(월남) 전쟁 영웅으로서 죽어서도 베트남(월남)전 참전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는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안장된 채명신 장군, 서부덕 소위를 비롯한 육탄 10용사 등이 안장돼 있다.


또한 국립서울현충원 16번 묘역에는 일본 도쿄(東京) 다이쿄지(大行寺)에 안치됐다가 이곳으로 모셔진 재일학도의용군 50위가 안장돼 있다.


# 육군상사 이원등의 묘 (53번 묘역)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6명의 대원을 이끌고 한강 상공에서 고공낙하 훈련을 지도하던 중 4,500피트 상공에서 대원을 차례로 낙하시키고 자신도 뛰어 내렸다. 이 상사는 먼저 뛰어내렸으나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김병만 중사를 보자 곧바로 사선이동 방법으로 접근해 김 중사의 낙하산을 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낙하산 펼칠 기회를 놓치고 결빙된 한강으로 추락, 순직했다.


교관으로서 훈련생의 안전에 최선을 다해 전우애의 귀감이 된 이원등 상사를 기리기 위해 추락 지점인 한강 노들섬(중지도)에 동상을 건립했고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제 53번 묘역 4판 30531번에 안장됐다. 


# 호국부자의 묘(공군소령 박명렬의 묘 , 공군대위 박인철의 묘 / 29번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시작된 이래 부자(父子)가 안장된 최초의 묘가 있다. 故 박명렬(공사 26기)소령과 故 박인철 대위(공사 52기)가 그 주인공이다. 박명렬 소령은 1984년 팀 스피리트 훈련 중 F-4E 전투기를 조종, 급강하 후 급상승하는 훈련 중 지상에 충돌하는 사고로 산화함으로써 국립서울현충원 제29번 묘역 3305번에 안장됐다.


박인철 대위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원망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빨간 마후라'에 대한 동경으로 변해가고, 결국 전투기 조종사의 꿈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꿈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수많은 갈등과 고민 끝에 내린 '아버지를 이어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어머니와 할머니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정식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그는 공군 20전비 121대대 전투조종사로서 2007년 7월 20일 KF-16전투기를 몰고 야간비행 임무를 수행하던 중 태안반도 서북쪽 해상에서 추락해 순직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그를 29번 묘역에 있는 아버지 박명렬 소령의 묘비 옆에 나란히 안장(29묘역 3557번)했다. 이는 1955년 국립서울현충원이 조성된 이래 부자가 나란히 안장된 최초의 경우이다.


# 종군기자 백광남의 묘 (51번 묘역)



1960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 1966년 10월 14일 월남전을 취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7년 월남 디안에서 국군 비둘기부대를 방문 취재하고 수도 사이곤(현 호치민시)을 향해 모터사이클로 단신 귀환도중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순직했다.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이고 유일한 순직이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생생한 전황 보도를 위한 취재활동을 하다 사망해 기자정신이 투철한 언론인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유해는 1966년 12월 5일 동아일보사장으로 안장식을 치른 후 제 51묘역에 안장됐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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