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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22] 미래도시 용산, ‘용산역사박물관(2)’
  • 우성훈
  • 등록 2024-05-12 2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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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움직인 거상, 경강 상인-군사 기지로 새로운 지형을 그리게 된 용산

[우성훈 기자]  18세기 수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뱃길이 중심이었던 경강을 기점으로 전국 단위의 유통체계가 잡혔다. 경강에서도 서강, 마포, 용산 일대의 상권이 크게 성장했는데, 그 중 용산은 세곡 운송에 특화된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은 세곡을 수송하는 일에 종사하여 큰 이윤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상업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경강상인이라 불리며 조선의 시장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경강상인은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시전상인과 경잴할만큼 강력한 자본력으로 18세기 후반 전국에 이르러 상품 유통을 장악했다. 그러나 1884년 용산이 개시장으로 지정되고 외국인 증기선과 자본이 유입되면서 세를 잃게 됐다. 


# 양화진과 마포를 제치고 개시장이 되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에 1년 후 양화진을 개시장(開市場)으로 삼는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조선은 청, 영국, 독일과도 이를 약속했다. 그런데 1883년 2월 독일 출신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개시장을 마포로 옮길 것을 제안하자 일본은 자체 측량 조사를 실시해 용산을 새로운 후보지로 내세웠고, 1884년 8월 최종적으로 용산이 한성 개시장으로 선정됐다. 


용산이 이전 후보지들보다 숭례문에서 가까운데다 수심도 못지않게 깊어 무리가 없기도 했지만, 경제적.상업적군사적 이득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한 일본이 각국영사들의 동의를 얻어 큰 이견 없이 개시장을 용산으로 바꿀 수 있었다. 


# 그림의 떡이었던 서빙고 얼음 



빙고는 조선시대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고 지급하는 일을 맡은 관청이다. 한양도성에서 사용한 얼음은 경강에서 채취했는데 용도에 따라 서빙고, 동빙고, 내빙고로 구분해 운반했다. 세 곳의 빙고 가운데 궁중 부엌에서 사용하거나 벼슬아치들에게 배급할 것을 경강변 서빙고에서 관리했다. 


겨울철 한강 쇄빙 전경얼음 한 덩어리는 1정(45X30X21cm)크기로 채취하는 사람들이 강에서 얼음을 떠내면, 운반하는 사람들은 한 번에 3정의 얼음을 지게나 소달구지에 싣고 빙고로 운반했다. 빙고에 얼음을 저장하는 것은 얼음 채취와 마찬가지로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저장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전담했다. 


술춘술을 담아 저장하거나 운반할 때 사용하는 용기로, 일제강점기 용산 환삼주조장에서 사용되었다. 환삼주조장은 용산역 앞에 위치했다. 


#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지 못했던 경강


도성 수비를 위해 편찬한 ‘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1751)에 의하면 성저십리에 용산, 서강, 두모, 한강, 둔지 5개 방이 신설됐다. 경강이 상업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외지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진 영향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경강이 뿌리내린 토착민이 대개 선업과 여객주인업에 종사하는 상인이었던 반면 이주민 대부분은 하역 운송업에 종사하는 품팔이 노동자였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신분사회였으나 경강 지역에서만큼은 경제적 원리가 앞서 작용했다. 상인 중에서도 부를 더 많이 축적한 이가 지배권을 획득했다. 당시 가장 큰 이윤을 취하던 층은 여객주인이었다. 


경강 주변은 수심이 깊고 강물의 유속이 일정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았을 뿐 아니라, 서해안과 한강 상류지역을 연결하는 운송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각종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귀한 물품들이 모여들었다. 


#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장으로


조선 후기 수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각 지역의 포구에 크고 작은 시장이 형성됐다. 수도 한양과 각 지역을 뱃길로 잇는 구심점이었던 경강은 자연스레 전국의 시장 가격을 조절하는 중앙시장의 역할을 하게 됐고, 경강 상업 지대의 규모도 점차확대됐다.18세기 이전 서강(양화-마포), 용산강(마포-노량), 한강(노량-한강진)의 3강으로 구분되던 경강은 18세기 후반 망원정(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서빙고, 한강, 두모포, 뚝섬의 8강으로 세분화됐다.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와 집결하는 기점이었던 용산은 서강, 마포와 함께 경강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음했다. 


# 군사 기지로 새로운 지형을 그리게 된 용산


한일합방공고문:한일합방을 조선 내에 홍보하기 위한 문서로 왼쪽 하단에 ‘용산인쇄국 인쇄’가 인쇄되어 있다. 용산인쇄국은 조선총독부 산하 공기업으로 옛 KT 원효지사 부지에 위치했었다. 1904년 2월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한일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전쟁에 앞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협약을 체결했다. 의정서에 의하면 일본은 군 전략상 대한제국의 영토를 임의 수용할 수 있었다. 


경성사화, 속경성사화/경성 공립소학교 교원회가 회원들의 향토사 연구를 위해 편찬한 역사서로, 경성부 촉탁부사 편찬 주임오카다 미쓰구 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간행했다. 경성(서울)에 관한 연혁과 역사 및 사적  등에 대한 안내와 흑백사진과 지도 등이 실려 있다. 

또한 대한제국의 방위를 담당한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에 불법 상륙시킨 일본군 가운데 하나의 사단을 차출해 한국주치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용산 일대 300만 평의 부지를 군용지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요구한 300만 평 가운데 일부는 철도용지로 전환하거나 대한제국에 반납되어 최종 확정된 면적은 약 118만 평이었다. 


조선궤상편람/1927년 조사 당시 조선 각 도의 행정구역 및  지면과 관공서 소재지, 철도, 군대, 교육, 종교, 상공업 등과 관계된 기관들의 소재지와 소개가 간략히 실려 있는 책자다. 일본은 여기에 용산기지를 건설하고 한국주치군을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주민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기지 밖 동쪽으로 강제 이주하게 됐다. 반면 기지 서쪽 용산역을 중심으로 신시가지가 개발되어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 용산을 영구적 군사기지로 계획한 일본의 움직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차지하게 된 일본은 용산에 영구적 군사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1차 병영 공사(1906-1913)는 조선군사사령부, 사단사령부, 보병.기병.야전포병 부대와 병영, 병기지창, 위수병원, 위수감옥 등 필수 시설을 갖추는 단계였다. 


조선주차군 제9사단사령부 장교 합동 관사/조선주차군 제9사단은 1914년 2월부터 1916년 4월까지 용산에 주둔했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한국주치군의 명칭이 조선주치군으로 버뀌었다. 그리고 1916년에 2년마다 일본에 있는 부대와 교대하던 제도를 정비해 상시 주둔하는 부대를 새로이 배치하고 병력을 늘렸다. 이에 기지를 확장하는 2차 병영 공사(1915-1922)를 실시해 숙소와 연병장 등을 추가 건설했다. 


# 선택 아닌 강요, 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청년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총동원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되어 1938년 4월 육군지원병제도를 통해 조선일이 일본군 병력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조선인 동원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은 1939년 병사부를 설치했다. 


조선주차군 병기지창/병기지창은 1907년 8월에 기공해 1908년 11월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일본군무기과 탄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비롯해 병기지창 부속건물들이 일부 남아 있다. 

함경도의 징병은 제19사단 소속의 병사부 2개소에서, 나머지 지역은 용산기지에 있던 재20사단 소속 4개 병사부에서 담당했다. 제20사단은 1943년 뉴기니아 전선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즈음부터 용산기지에 있던 조선군사령부는 병사부를 13개소로 늘리고 전국에서 조선인 징병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면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1943년에 대학생들을 군대로 편입시키는 학도병제, 1944년부터는 강제 징병제를 실시했다.


# 을축 대홍수 




1925년 을축년 여름 무려 네 번의 홍수가 발생했는데 그 중 7월에 발생한 두 번의 홍수로 용산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20년대 한강 인도교 최고 수이가 평균 9-10m이었는데, 을축 대홍수 때 11.66m에 달했다. 이태원을 제외한 용산 대부분이  침수되어 32,5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일제의 차별정책으로 제방 설치가 미비했던 이촌동에 피해가 극심했다. 한편 신용산 지역에 형성됐던 일본의 거류지가 한강 범람의 위험을 피해 보다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인은 이태원, 서빙고동 등 용산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 한강 인도교







한강 인도교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도보 다리로 용산과 노량진 사이를 이었다. 일제강점기 용산은 일본의 편의에 따라 개발된 지역이다. 한강 인도교 역시 본질적으로 일본인을 위한 시설로 건설됐다. 1917년 10월 7일 오전 에 열린 도교식은 1,00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할 만큼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날 저녁 경성 시내에 꽃과 전등으로 장식한 전차가 운행됐고, 특히 용산 일대에는 모든 전등을 켜게 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다음회에 계속(사진-우선훈 기자(자료사진은 재촬영 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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