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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38] 신라 51대 진성여왕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봉원사 (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25 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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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해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해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돼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했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했고,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됐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됐고,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했으나 소실됐다.


1899년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법명 원종)이 공주 마곡사를 떠나 서울 서문 밖 이곳 새절(지금 봉원사)에 머물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형세를 살폈다. 새절에서 인연이 닿은 사형(師兄) 혜정(慧定)스님과 동행해서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우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1945년 주지 기월(起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했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이 봉원사를 다시 방문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됐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 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됐다.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했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


# 대웅전 



내부(內部) 공간구성에 있어서는 내부 고주없이 중앙불단을 뒤로 후퇴해 설치함으로서 예불공간을 크게 확보했다. 즉 고대의 탑(塔)중심의 의식에서 불상(佛像)의 등장으로 인한 법당중심의 가람(伽藍)이 구성되어 근세(近世)에서는 법당내부에서 불상(佛像)에 직접적인 의식과 예불이 많아졌다.




깊이가 깊은 예불공간의 구성(構成)은 의식(儀式)의 원활성과 많은 불자(佛子)들이 들어올 수 있는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은 내부공간이 예불중심의 공간으로 전환된 조선말(朝鮮末)후기의 사찰(寺刹)의 특징을 대변하는데 봉원사(奉元寺)대웅전 내부구조(構造)가 좋은 실례(實例)이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24년(1748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이건(移建)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보이고 외9포 내11포 위에 5량 5포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대웅전에는 영조대와의 하사품인 '대웅전' 현판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됐고, 1991년~ 1993년 도화주로 김혜경 스님과 대중스님들의 원력으로 재건했다.



법당안의 보물급 탱화들은 그때 소실됐고 지금의 탱화와 단청은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고 법당안의 범종(梵鐘)은 충남 덕산 가야사에 있던 종인데 조선시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수행하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때 타지 않고 있던 종을 옮긴 것이다. 대웅전 건물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됐다.


# 삼천불전(三千佛殿)






1945년 화주 김기월 스님과 화주 김운파 스님의 연력과 전 사부대중이 원력을 합해 46간(間) 대규모의 광복기념관으로 건립한 바 있으나 불행히도 1950년 9월 25일 6.25사변중 한강 도하작전대 소실됐다. 이때 영조의 친필 '봉원사' 친필을 비롯한 '이동인, 김옥균'의 유물 등 중요 문적(文籍)이 소실됐다.




1986년 주지 조일봉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건물허가 및 준비 과정을 거쳐 1988년 삼천불전의 복원불사가 시작됐고 주지 김성월스님, 주지 김혜경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을 합해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의 (210평) 건물로 9년여만에 완성했다. 대들보 무게 7톤으로 알라스카산 수령 227년된 나무들을 사용했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내부에는 비로자나불과 삼천불을 봉안했다.


# 부처님 진신사리탑




봉원사 대중스님과 신도 75명은 불연으로 불기2535년 7월 22일(서기 1991년 음력 6월 21일) 스리랑카 공화국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 소재의 강가라마사의 그나니사라 대승정배려로 사리 1과를 모셔왔다. 여러 사정으로 사리를 탑에 모시지 못하고 있던중 구대 이구품행 회장의 원력과 여러 신도님의 원력으로 사리를 모시게 되었다.    


#  대방(大房)



이 대방은 원래 염불수행을 전통으로 해온 봉원사의 염불당(念佛堂)이다. 이 건물은 본래 조선말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 건물을 이건하면서 일부 변형 및 축소되어 건립됐다. 주불은 아미타불이고 300년전 북한 철원군 소재 보개사 (심원사)의 불상을 백련사와 몇개의 사찰에 모셔놓았는데 영험이 있다해 모셔놓은 불상이다. 이 건물은 1966년 ~ 1967년 주지 최영월 스님, 도화주 김운파 스님에 의해 복원됐다.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湖碧樓)무량수각(無量壽閣)'형식은 팔삭지붕 민도리집 형식이고 중앙(中央)대중방과 마루사이는 벽이 없어서 행사시 전체를 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서도가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湖碧樓)'와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이 있고 부엌문의 신장도는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다.


# 극락전(極樂殿)




주불로는 아미타불 협시불로는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비교적 화려한 단청이고 전면 문살대 위에는 대나무, 국화, 연꽃 및 각종 화초를 덧붙여 화려함을 장식했다.


# 명부전(冥府殿)







이 건물 전면에는 명부전 편액과 4개의 주련이 있는데 편액은 600년전 유학자 정도전의 친필이고 주련은 친일파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친필이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주불로하고 협시불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봉안했고 십대왕이 좌, 우에 모셔져 있고, 내부에 불상 및 십대왕은 목조각품(木彫刻品)으로 빼어난 형상과 가치가 보물급 수준으로 평가된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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