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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08]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중견 육성-백두산 일대로 신민부 세력 확대한 '김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29 0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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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김혁, 1875 ~1939, 독립장 (1962)


본년(1924)은 갑자년에 해당하고, 조선독립 실현의 기운이 익어오고 있다. 두만강을 건너 삼각산 상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높이 부르며 우리 민족이 왜노(倭奴)의 압정을 제거하고, 열국(列國)에 우리의 독립을 선포하는 최초 시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방해하는 자는 군법에 의하여 엄히 처벌할 것이요, 우리 민족 된 자는 이 때를 당하여 전력을 다해서 후원하여야 할 것이다. - 선생이 조직한 대한독립군정서의 결의사항 중에서(1924. 4)


# 육군 무관학교 출신 대한제국 육군 정위, 군대 해산 후 대종교 입교하고 중국으로 망명


김혁(金赫, 1875.10.6 ~ 1939.4.23) 선생은 1875년 10월 6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법부 참서관을 지낸 김태식(金泰植), 모친은 윤현숙(尹顯淑)으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소(學韶), 자는 순익(舜翼), 호는 오석, 본관은 경주이다.


어린 시절 선생은 8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향리에서 한문을 배웠다. 1894년부터 1896년 초까지는 용인향교에서 개신 유학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98년 6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사관교육을 받고,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조국과 민족의 간성(干城)이 된 것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육군무관학교 교육은 자주 국방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근대식 군사교육이었고, 더구나 반일적 성향의 민족교육이었다.


때문에 박승환·이동휘·노백린 등에서도 보이듯이 이 시기 졸업생들은 반일 민족의식이 강했다. 선생이 뒤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 시기 무관학교 교육에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이후 선생은 대한제국 시위 보병 제1연대에서 부관 장교로 근무하였고, 1907년 8월 군대 해산 당시에는 육군 정위(현재 대위급)까지 진급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비분강개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 같이 선생이 항일 구국운동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세를 명철히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생이 남다른 국제적 감각과 의분이 넘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고향에 내려간 뒤 얼마 안 있어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당하여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에 선생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적 기개를 지키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여 갔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대종교 참교(參敎)가 되었고, 1917년에는 지교(知敎)에 이르렀던 것이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용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한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대종교 교도들이 조직하여 활동하던 단체를 찾아 나섰다. 이때 선생은 1919년 3월 무송현에 근거지를 두고 서간도 각지에 지단을 설치하여 활동하고 있던 흥업단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흥업단은 농민과 군인이 따로 없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군사 훈련하는 병농겸행(兵農兼行)의 방책을 취하여 동포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는 데 공헌하던 단체이다. 이 조직은 부단장인 선생을 비롯하여 단장에 김호,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 경호 오제동, 교섭 전성규(이현익) 등으로 모두가 대종교 교도였다. 만주 각 현에 지단․지부 조직을 두고 있던 흥업단의 부단장 직책을 맡았다면, 선생은 대종교 내에서 위치가 상당히 높았고, 실질적으로 단체를 이끌어갔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업단은 활동하는 동안 중국군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혹은 일경의 꼬임에 넘어간 중국 군경들의 습격으로 청년 훈련소 사관생들이 중국 관청에 감금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을 비롯한 간부들은 현지 관헌들과 교섭하여 일을 잘 해결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흥업단은 주위에 산재한 대한독립군비단·광복단·태극단·대진단 등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1921년 가을 군비단·태극단과 함께 의용대를 갑산·신흥 등지로 보내 적 경찰대를 습격 섬멸한 일이 있었다. 이후 그 해 겨울에 군비단·태극단·광복단 등 장백·무송 지구의 무장 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이라는 대군단을 이룬 뒤, 1922년 8월에는 박준혁·강승경이 이끄는 1대가 삼수군의 영성주재소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 북로군정서에서 청산리대첩 치르고, 대한통의부 군사부감이 되어 항일 무장투쟁


이러한 군사활동의 기반은 청년훈련소인 연무소에서 배출된 청년군사들이었는데, 이들의 교육은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참모와 군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즉 전성호, 강승경이 군사교육을 시켰고, 선생을 비롯한 박장빈, 이옥규, 최시언, 한승제 등이 조직, 훈련, 작전 등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흥업단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로군정서와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봄에 약 3백 명의 군사를 더 모집했고, 이성규를 국내에 보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유능한 인물인 김규식, 홍충희, 김찬수, 박형식 등을 포섭해 왔다. 1920년 8월 무렵 대한제국 군대의 정위를 지냈던 선생도 흥업단을 떠나 유우석과 함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핵심 인물이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 선생이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위치로 보아 선생은 북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여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선생은 그곳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이후 러시아로 갔다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북로군정서 장병들이 흩어지고 총재 서일이 자결하는 등 비운을 겪게 되자, 선생은 현천묵, 나중소 등과 함께 온갖 난관을 극복해 가며 군세를 수습 정비하여 전투력을 보전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즉,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복귀하여 각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통합 움직임은 1922년 8월 남만주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교회, 대한광복단군영, 대한정의단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 통군부 등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립한 대한통의부로 결실을 맺었다.


대한통의부는 중앙기구로부터 지방기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짜임새 있는 조직을 정비하고, 지방자치행정과 군사양성기구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군대의 이름을 대한통의부 의용군이라 명명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대한통의부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된 선생은 군사부장 양규열, 사령장 김창환 등과 함께 남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지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혁 선생의 대한제국군 이력서# 대한독립군정서 대표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성동사관학교 설립, 치열한 독립투쟁


1924년 초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선생은 현천묵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조성환, 나중소, 김규식, 이장녕 등과 함께 참모로서 활약하였다. 남만주 대한통의부에서 활동을 그만두고 북만주로 돌아와 다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 옛 동지들과 독립운동 통일단체로 신민부를 조직하기 위해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점은 선생의 이후 행적을 통해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1923년 1월 상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들도 희망을 갖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참가단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통일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의 수뇌인 김규식, 신숙, 윤해, 원세훈 등 30여명은 1923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가 코민테른의 양해하에 1924년 2월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회합하였다. 창조파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으로는 김규식, 신숙, 이청천, 김응섭, 윤해, 강구우, 한형권, 오창환, 김세준 등이 선임되었다.


선생이 창조파 국민위원회에 참여한 사료가 보인다. 언제 가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이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있다가 해임된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이다. 당시 해임된 인물은 선생을 비롯하여 13명이었는데, 고문이던 박은식, 이동녕, 이동휘 등 3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선생은 자신이 원해서 입회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들 집행위원회에서 임의로 선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김홍일, 한창걸, 김창숙 등과 함께 해임된 것을 보면, 북로군정서와 대종교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공화주의자인 선생이 국민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는데 초점을 둔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 결과 1925년 3월 영안현 영안성 내에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 교육회 및 북만주 16개 지역의 민선대표, 10개의 국내단체 대표 등이 참가한 가운데, 북만주 지역의 통일 독립운동 단체로 신민부가 결성되었다. 이때 선생은 대한독립군정서 대표의 1인으로 참석하였다.


신민부는 동만주 지역의 돈화현과 안도현 일대와 하얼빈에서 수분하를 연결하는 중동선 연변일대에 조직망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재만 동포에 대한 자치활동, 북만주 지역 친일 밀정 처단, 그리고 국내에 요원을 파견하여 조선 총독 처단을 계획하는 등 군사, 문화, 행정 등 각 방면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新民府를 組織신민부의 조직은 삼권분립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행정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 사법기관인 검사원, 입법기관인 참의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검사원은 정의부 등에서도 그랬듯이 실제로 운영하지는 못했고, 참의원 또한 독립전선에서는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행위원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선생이 실질적으로 신민부를 주도하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생이 주도하였던 대한독립군정서의 독립운동 방략은 북로군정서와 마찬가지로 무력투쟁을 통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이었다. 즉 대한독립군정서는 자금을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친일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를 완전히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이의 실현을 위해 흑룡강성 오운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정서의 투쟁방략은 선생이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자 자연스럽게 신민부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선생이 부임하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런 일로 생각된다.


성동사관학교에서는 초기 150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에 힘썼다. 교장에 선생을 비롯하여,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성세 외에 5명이 있었고, 고문으로는 이범윤, 조성환이 임명되었다. 매년 2회에 걸쳐 속성으로 사관을 양성하여 총 500여 명을 졸업시켰는데, 이들은 신민부 독립군의 중견간부로서 항일 무장투쟁의 기둥이 되었다.


#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중견 500여명을 육성. 백두산 일대로 신민부 세력 확대


이와 함께 선생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 중에 하나는 신민부의 세력 확대였다. 나아가 세력범위에 들어 있는 지역의 동포들을 독립운동 전선으로 끌어들이는 것에도 주안점을 두었다. 당시 신민부는 북으로 밀산현과 남으로 장백산맥의 주봉인 백두산 지역을 실력양성소 예정지로 지정하고 있었고, 그의 실현을 위해 선생이 직접 밀산으로 갔다. 그러나 원로의 반발로 이 지역을 활동 거점으로 하려 했던 전략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신민부는 둔전제 실시를 계획하고는 백두산 삼림지대인 안도현에 조사단을 보냈다. 그 결과 1926년 5월 신민부는 남쪽의 장백산맥 주봉인 백두산 지역을 실력양성소 예정지로 지정하고 첫 사업으로 이강훈 등을 파견하였고, 얼마 후 선생도 엄우영을 대동하고 갔다.


이강훈으로부터 그동안 견문한 각지의 실정을 보고 받고, 동포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교육기관의 설치임을 알자, 선생은 이를 쾌락하고 엄우영을 우선 교원에 임명한 후, 이강훈도 교육사업을 돕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곳 동포들도 자진하여 교사를 건축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해 왔다.


이처럼 선생은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통합 단체인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투쟁 기반확충과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항일운동에 매진하도록 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28년 1월 25일 선생을 비롯한 신민부의 핵심 간부들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과 그에 매수된 만주경찰대에 의해 피체되었다. 1928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때는 (1928년) 음력 정월 초 엿새날 아침 여섯시! 공교히 한 곳에 모여 있다가 한자리에서 잠을 자던 신민부의 중요 간부 열 두 사람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미처 대항도 못하고 뒷문으로 나왔으나 이곳저곳에 매복하여 있는 것은 경관 뿐이요, 김좌진은 그림자도 안보이매 최후수단으로 각각 헤어져서 피신코자 하였으나 나는 새도 벗어날 수 없이 경관대는 겹겹이 에워싸고, 그들은 전기 석두하에 있는 고려소학교로 길을 열고 맹렬히 습격하므로 전기 12인은 할 수 없이 전기 소학교로 은신을 하려 할 때에는 벌써 철통 같은 포위망은 갈수록 견고하여 12인 전부가 체포된 것이다.


신민부는 선생을 비롯한 중요 간부 12인이 체포됨에 따라 위기에 봉착하였고, 또 그러한 상황은 재만 독립운동계의 전체적인 위기감을 초래하여 만주지역에서 유일당 운동을 가속화시킨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일제는 신민부의 왕성한 활동에 공포를 느껴 반동분자와 합작하여 신민부 요원들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위협 상황 속에서도 신민부는 혈전태세를 갖추고 보민회 등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던 친일 주구들을 숙청하는 공작을 행하면서 일제 앞잡이 기관인 하얼빈 조선인거류민회에 대한 파괴 활동을 전개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좌)김혁 선생의 피체 사실을 알리는 기사(《동아일보》1928년 1월 28일자)(우)1928년 피체 직후의 김혁 선생 모습(《동아일보》1928년 3월 22일자) 

# 일제에 피체됐으나 긴긴 수감생활 동안 회유 압력에 굴하지 않아


피체된 뒤 선생을 비롯한 신민부원 10명은 신의주로 호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2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은 뒤, 같은 해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이로부터 선생은 신의주형무소, 평양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선생은 의연히 일제의 회유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9년여의 옥고는 선생의 몸에 병마가 침투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1936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향리에서 요양하였으나 오랜 옥고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9년 4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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