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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 102] 김승학 "독립신문을 상하이에서 복간...우리 독립운동 널리 알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2-11 2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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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김승학, 1881 ~1964, 독립장 (1962)


우리 광복군 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 직속한 군단이며, 임시정부 군무부를 대표하여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 동포들의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한 경우를 무릅쓰고 다니면서 모집하였고, 4천리 되는 상해를 왕반(往返)하면서 수륙 양로로 가진 고난을 겪으면서 구입한 것이다. (중략)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가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1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 광복군 사령부 무기 수여식에서 행한 선생의 연설 중에서(1920. 9) -


# 찢어지도록 가난했지만, 10살 때부터 한학 공부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1881.7.12 ~ 1964.12.17) 선생은 1881년 7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枇峴面) 마산동(馬山洞) 동상곡(東上谷) 신보라(新保羅) 절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배천(白川), 호는 희산(希山), 자는 우경(愚卿), 만주에서 활동할 때 김탁(金鐸)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대왕의 의주 파천을 도운 공신 가문이었지만, 선생이 태어날 때는 가세가 몰락하여 소작농 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선생 자신도 “어렸을 적에는 가세가 빈곤하여 아버지는 밭 갈고 어머니는 길쌈하여 근근이 입에 풀칠할 정도여서, 자녀의 교육을 돌볼 힘이 없었다. 소작농 생활을 하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공신의 후예로 남다른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10살 때인 1890년 10월부터 인근의 조산재(造山齋)라는 서당에 들어가 1897년까지 8년 동안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때의 공부는 주로 제술학(製述學), 즉 과거시험 공부였다. 그러던 선생이 경학(經學), 즉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것은 1899년부터 조병준(趙秉準)이 주석하던 증곡재(曾谷齋)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조병준은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강학하였던 대학자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의 제자였다. 그런데 이들 형제들은 위정척사론의 대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들이었다. 때문에 조병준 또한 강렬한 척사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증곡재에 있던 서북 출신의 문도들은 경학을 수학할 뿐만 아니라 국사도 토의하던 때였다. 따라서 선생은 스승인 조병준의 영향,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강화되고 있던 외세의 침탈 상황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척사적 민족주의를 수용하여 갔던 것이다.


# 한학자 조병준 선생 문하에서 “우리 고장 선비들은 왜 항일하지 않느냐”는 질책 들어


특히 1900년 3월 증곡재에서 박문일의 제사를 마친 뒤, “우리는 섬오랑캐 왜노(倭奴)와 4백 년 동안 원수인데 지난 을미년(1895)에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慘弑)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왜노와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이며, 더욱 우리 선비로서는 거의하여 왜노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 그러므로 삼남 학자들은 여기저기에서 거의하여 혈전하는데, 우리 고장 선비들은 묵묵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라고 통탄해 마지않는 조병준의 말을 듣고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이는 선생이 항일 민족의식을 공고히 하게 된 직접적 계기였고, 또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한 결정적 동기였던 것이다. 190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간도 환인·통화 지방 등을 탐방하면서 항일투쟁을 모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간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뒤, 선생은 1903년 가을부터 인근 광제재(廣濟齋)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 봄 학부에서 전국적으로 실시한 한문학사 선발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상경하여 학문박사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시험 부정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학무국장 장세기(張世基)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자 그는 선생을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선생이 신학문에 접하게 된 것은 이렇게 다소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곳곳에서 항일 강연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옥고


1904년 8월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1년여 동안 신학문을 수학하며, 척사적 민족주의의 토대 위에서 근대적 선진 학문을 접목시켰다. 때문에 이후 선생의 활동이 투쟁의 면에서는 척사적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지향의 면에서는 근대성을 띠게 된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한성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한 뒤 1905년 9월 귀향하였던 선생은 1907년 여름 다시 상경하였다. 그것은 헤이그 특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되는 등 국망의 상황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위기상황이 도래하자 선생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선생은 상경하여 종로 각 노상으로 다니면서 배일 강연을 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평리원 구치감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감한 뒤, 선생은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말 선생의 국권회복운동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당시 최대의 국권회복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면 면감(面監)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9월에는 의주 극명(克明)사범학교 학감, 1909년부터는 의주 명의(明義)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한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 발생한 안중근 의거는 선생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직후부터 일제가 선생을 감시하고 탄압하였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일경이 선생이 봉직하던 학교에 와서 안중근과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괴롭힐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학부형들에게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고 이간질하면서 교육계에서 추방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은 유인석의 문도이며 조병준의 친구인 장세정(張世正)을 찾아가 이러한 결심을 밝혔다. 그랬더니 장세정은 “군(김승학)은 만주로 가서 조병준 선생을 보좌하여 활동하라. 이 노물은 아무 힘도 없지만 국내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밀조하겠다”고 격려하여 주었다. 나아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1910년 10월 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2년에는 동삼성 관립 강무당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갔다. 동삼성 강무당에서 6개월의 무관 교육을 받은 뒤, 선생은 만주에 있는 의병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한 직후 만주에 있던 의병단·향약계·농무계·포수단 등이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재무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독립단 지부를 조직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계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 임시정부의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으로 들어가 독립자금 모금


우선 선생은 1919년 8월초 동창생인 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을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에 있던 대한독립단 도총재부로 초청하였다. 국내에 들어가 활동할 것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 지단의 설치에 대해 도총재 박장호(朴長浩)의 결재를 얻고, 평안남북도 특파원의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났다. 국내로 진출하려는 도중에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 있는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독판부 독판 조병준을 방문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에서도 내무총장 안창호의 발의로 국내 행정 및 연락 조직망으로 연통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평안북도 독판부는 바로 그 도(道)단위 조직이었고, 조병준은 그 책임자였다. 마침 평안북도 독판부도 국내 특파원을 파견할 예정인지라, 선생은 그 특파원의 사명까지 띠고 압록강을 건넜다.


한국독립사이후 선생은 이듬해 1월경까지 대한독립단 및 임시정부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구성·태천·영변·운산·영유·숙천·순안·강서·용강 등 평안남북도 일대 52개소에 연통제 기관과 독립단 지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지로 다니며 임시정부와 독립단을 선전한 결과, 국내 각 기관에서 청년들이 많이 찾아 왔고 독립운동 자금도 수 만원이 모금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독립단의 무기 구입 및 활동 자금으로, 또 임시정부 평안북도 독판부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서간도로 귀환한 선생은 곧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단·한족회(韓族會)·청년단연합회(靑年團聯合會) 등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항일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①각 단체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倭敵)의 행정기관 파괴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名義)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임시정부가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②연호(年號)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③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의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法名)을 요청할 것 ④통일기관은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⑤통일기관의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의 특별 수입금은 통일기관 군사비에 보용할 것” 등을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2월 관전현 향로구에 통일기관을 설치한 뒤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그간의 정황을 보고케 하고, 그 기관의 명칭을 받아 오도록 하였다.


3 상하이로 가서 독립군이 쓸 무기를 구입하여 오는 일 맡아


이 같은 사명을 띠고 상해로 파견된 것이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에게는 이외에도 중요한 임무가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은 무기를 구입하여 오는 일이었다.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통일기관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이용할 무기였다. 대한독립단은 물론 서간도 지역 독립군 활동의 성쇠가 달린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것이었다.


1920년 2월 보름 선생은 김창의(金昌義)와 함께 안동현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당시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아일랜드인 조지 쇼(J. Show)가 운영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편으로 상해로 갔다. 선생은 상해에 도착한 뒤, 바로 도산 안창호를 방문하여 서간도의 사정을 보고하고, 무기 구입의 알선을 부탁하였다. 도산은 이를 당시 경무국장이던 김구에게 맡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사정은 “김구 군이 내방하여 말하기를 안동 독립단 대표 김승학 군의 요구에 따라 단포(短砲)를 구입할 때, 말과 일의 차이가 생겨 김군(김승학)이 크게 의혹하고 불평하여 곤난한 일이 있다”고 한 <도산일기> 1920년 6월 28일자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 240정의 총과 수만 발의 탄약을 독립군 병사들에게 분배할 때의 감격


하여튼 선생은 한족회 대표 이탁(李鐸)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부로 가서 남만의 운동단체를 통합한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기관의 이름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1920년 8월 미 의원단이 상해를 경유할 때 독립단 대표로 환영하고, 독립운동 지원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건네기도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정 요인들에게 만찬을 베푸는 한편, 정부 기관을 비롯한 무관학교·독립신문사 등에 약간의 경비를 지원하였다.


물론 선생은 상해에 온 사명도 수행하여 갔다. 우선 통일기관의 이름으로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와 광복군 참리부(光復軍參理部)라는 명칭을 받았다. 광복군사령부는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남만의 독립군 군정 일체를 관할 지휘하고, 광복군 참리부는 임시정부 내무부 직할로 남만 교민동포를 통치하는 사무 일체를 관할 지도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광복군사령부 군정국장 겸 군기(軍機)국장에 선임되었다.


무기 구입의 임무도 완수하였다. 선생은 권총 등 모두 240정의 무기와 수 만발의 탄약을 구입한 뒤, 같은 해 음력 8월 보름 다시 이륭양행의 기선을 타고 서간도로 귀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무기를 광복군사령부의 독립군 병사들에게 분배할 때, 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 그 편린이 무기수여식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선생의 연설에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 광복군사령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직속한 군단이며, 임시정부 군무부를 대표하여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 동포들의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한 경우를 무릅쓰고 다니면서 모집하였고, 4천리 되는 상해를 왕반(往返)하면서 수륙 양로로 가진 고난을 겪으면서 구입한 것이다. (중략)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가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1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 광복군 휘하 독립군, 56개 일본 주재소 공격, 일본 군경 95명 사살


이들 무기를 가지고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광복군사령부 휘하 독립군들이 거둔 성과 또한 컸다. 즉 광복군사령부 휘하의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부대는 3 ~ 4개월 동안 일본군과 78회 교전하면서, 56개소의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20개소의 면사무소와 영림창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으며, 일본 군경 95명을 사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 지역의 정세는 악화되었다. 특히 1920년 10월 ‘훈춘사건’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이른바 ‘간도출병’이 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북간도에서 봉오동·청산리대첩을 거두었던 독립군 부대들은 밀산을 거쳐 노령으로 이동하여 갔고, 서간도 독립군 부대들 또한 북상하여 노령으로 이동하거나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이 만주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선생은 1921년 3월 중순 재차 상해로 갔다.


# 독립신문을 상하이에서 복간하여 우리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자


다시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바로 독립신문의 복간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의 발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되어 있었다. 발행을 주도하던 이광수는 변절하여 귀국해 버렸고, 일제의 집요한 교섭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에 의해 신문사는 봉쇄되고 인쇄 도구는 압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신문의 복간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상해는 동양 제일의 국제도시이므로 독립운동을 선전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고, 따라서 선전 기관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프랑스 조계 당국과 교섭하여 독립신문 복간을 허가 받고, 또 가지고 있던 독립운동 자금을 이용하여 신문사와 인쇄소를 복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21년 4월 중순 독립신문은 복간되기 시작하였고, 선생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그 발행을 총괄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선생은 독립신문사의 부대 사업으로 교과서편찬위원회를 부설하고, 박은식·조완구·윤기섭·김두봉·정신·차리석·백기준 등과 함께 교과서 편찬 사업도 벌였다. 이 같은 활동은 한말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가져왔던 근대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교과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이 항일투쟁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하고, 또 그것을 보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데는 바로 이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선생은 한·중 양국인의 항일 연대투쟁과 친선 도모를 위해 조직된 한중호조사 선전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위축되던 시기인 1924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 그리고 같은 해 5월 학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학무총장을 대리하면서 그 세력 회복과 확대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1929년 3월 20일자 기사그러던 중, 임시정부는 1926년 10월 선생을 육군 주만 참의부 제4대 참의장으로 임명하여 남만 독립군 단체의 통합 사명을 부여하면서 취임하기를 독촉하였다. 그것은 이 시기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1925년 6월 11일 중국 동북 군벌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에 따라 독립운동의 환경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①중·일 양국 경찰은 합작하여 봉천 동부에서 활약하는 한인 독립운동을 방지할 것 ②중국 당국은 한인 독립운동자를 체포하여 인도할 것 ③한인 수령(首領)의 성명을 일본 당국에 통보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삼시협정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 무장투쟁단체의 활동은 물론 그 존립마저도 위협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에는 1925년 이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 3부가 정립(鼎立)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독립운동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때문에 3부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하였고, 그것은 1926년부터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유일당운동에 의해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3부 통합의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선생이었다. 이는 임정이 선생의 지도력과 1920년 2월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남만의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하여 광복군사령부를 결성하였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1927년 3월 선생은 참의부 소재지인 서간도 환인현에 도착하여 3부 통합운동을 주도하여 갔다. 같은 해 8월 정의부도 제4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전선 통일을 위하여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것과 전민족의 독립운동전선 통일을 위하여 유일당 촉성을 준비할 것” 등을 결의함으로써 3부 통합에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각 부에서 3명씩 대표를 선출하여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참의부 대표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장기초·박희곤 등 3인, 정의부에서는 김동삼·이청천·이관일 등 3인, 신민부에서는 김좌진·정신·김동진 등 3인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길림에 모여 3부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3부 통합회의가 진행되던 중, 참의부 내에서 선생이 없는 틈을 타서 내분이 생겼다. 제3중대 심용준 일파가 중앙호위대장 차천리(車千里)를 살해하는 구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나아가 심용준 일파는 1929년 4월 정의부 주류파 및 신민부 민정파와 연합하여 국민부를 결성한 뒤, 조선혁명당과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설치하여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어 갔다.


이렇게 되자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주류파는 같은 해 11월 신민부 군정파 및 정의부 소수파와 연합하여 군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나아가 ‘이당치국론’에 따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설치함으로써 이들 또한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1929년 11월 말경 회의를 마치고 각 대표들이 귀대하던 도중 김동진은 중동선에서, 정신은 화피전자 부근에서 각기 피살되고, 김동삼은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더욱이 김좌진은 이듬해 1월 중동선 산시에서 공산당원들에게 피살됨으로써 한국독립당 세력은 약화되었다.


# 중국에서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기까지 5년간 옥고


선생 또한 통합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던 중, 통화현과 환인현의 경계인 와니전자(蛙泥甸子) 서구(西溝)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통화현 일본 영사관에서 2주일 동안 문초를 받았는데 주로 상해에서 무기를 얼마나 구입하였는가, 또 독립운동사 자료를 수집한 것은 어디 두었는가 하는 것을 조사 받았다. 그리고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을 거쳐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이후 1935년 4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할 때까지 5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것은 물론 독립운동을 재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한 가지 이유는 만주 천금채(千金寨)에 맡겨두었던 독립운동 자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점을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독립운동 사료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선생은 북경에 주재하면서 천진의 안경근과 협조하여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고, 또 청년들을 선발하여 김구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남만주 사평성 예문촌(禮文村)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동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 나라 잃은 설움과 투쟁의 기록을 독립운동사로 편찬하고 숨을 거둬


출옥후의 김승학 사진.광복 직후 1945년 9월 상순에 귀국한 선생은 그동안의 숙원이던 독립운동사 편찬 작업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사 편찬회를 조직하여 신의주 노송정에 사무소를 두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 정국의 정세는 선생을 거기에 매달려 있게 만들지 않았다. 즉 옛 동지들인 오광선·전성호·김해강 등이 찾아와 정당 활동은 하지 말고 군사단체를 조직하자고 권유한 것이다. 선생은 이에 찬동하여 상경한 뒤 한국혁명군이라는 명칭 아래 동지를 모집하였는데, 그때 임정의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의 전갈이 왔다. 그것은 한국혁명군을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고치고 선생이 참모장의 임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뒤, 선생은 ‘광복군 국내 제2지대’ 설립 책임을 지고 개성으로 갔다. 여기서 해외에서 입국하는 청년 100여 명과 국내 청년을 모아 만월대에 임시 군영을 두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미 군정의 지시로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후 상해에서 간행하였던 독립신문을 속간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정부 수립 직후 임정 기관지로 남한 단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광복 이후 선생이 가장 심혈을 쏟은 것은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선생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판시(主辦時) 백암 박은식 동지가 편저한 한국통사라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자고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다년간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포두에 우거(寓居)하시든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히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선생은 6․25 직후인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선생은 1964년 한국독립사를 탈고하였지만, 그것이 출간되기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사망하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선생의 한국독립사는 유고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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