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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85] 조선시대의 국립음악기관 '장악원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31 03:20:07
  • 수정 2024-04-10 21: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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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장악원(掌樂院) 터는 조선시대 궁중과 국가 행사에서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인 장악원이 있던 자리이다. 장악원은 1897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존재한 국립음악기관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 설립되면서 지금에 이른다.



장악원(掌樂院)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조선시대의 국립음악기관이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 및 왕실 행사에서 행해지는 무용 및 연주활동은 전악서(典樂署), 아악서(雅樂署), 관습도감(慣習都監), 악학(樂學) 등의 여러 기관에서 나누어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1457년(세조 3)에 전악서와 아악서가 장악서(掌樂署)로, 악학과 관습도감이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각각 통합됐다. 이후 1466년(세조 12)에 악학도감의 일부를 장악서가 흡수하면서 궁중의 음악과 무용, 연주를 담당하는 기관이 장악서로 통합됐다. 1470년(성종 1)에는 장악서의 명칭이 장악원(掌樂院)으로 바뀌었다. 장악원 터는 조선시대 장악원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66 외환은행 본점 일대에 해당한다.



장악원의 모든 음악행정은 문관 출신의 관원이 관장했고, 음악교육 및 춤 연주에 관한 일은 전악(典樂) 이하 체아직(遞兒職, 조선시대 교대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던 관직)이었던 녹관(祿官)들이 수행했다. 그리고 장악원에서 실제로 음악을 연주하고 무용을 공연한 것은 장악원 소속의 악공(樂工), 악생(樂生), 관현맹(管絃盲), 여악(女樂), 무동(舞童)들이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이후 장악원은 궁내부의 장례원(掌隷院)에 소속됐다가 1897년(고종 34) 교방사(敎坊司)로 명칭이 바뀌었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에는 장악과(掌樂課)로 축소 개편됐고, 국권피탈 이후에 아악대(雅樂隊)로 개편되어 명맥을 이어갔다. 이후 191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다시 축소 개편됐고 인원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광복 직후에는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개칭됐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0년 1월 18일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 설립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구 을지로 66 외환은행 본점 앞 화단에 1986년에 설치된 장악원 터 표지석이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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