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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7] 유림 “모든 독립 운동의 역량을 임시정부로 총집중해야 합니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25 18: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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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유림, 1898 ~1961, 독립장 (1962)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당시 나는 일본 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자주독립이 언제 달성될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허다한 난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이 이 한 고비의 난관만 돌파하면 반드시 독립하리라는 것이 환하게 내다 보였다. 이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근거를 나는 망명한 임시정부라고 보고 거기에 합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독립이란 산을 넘은 후에, 각자의 주의를 위하여 매진하는 것이다. 임시정부란 요컨대 그러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요 근거라는 말이다. - 환국 직후 유림 선생의 기자회견 중에서(1945. 12. 5) -


# 경술국치 접하자 손가락 잘라 ‘충군애국’ 혈서 쓴 소년


유림(柳林, 1898. 5. 3 ~ 1961. 4. 1) 선생은 1898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계곡동에서 중소지주인 아버지 이흠(頤欽)과 김성옥(金性玉)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호는 단주(旦洲)·월파(月波), 본명은 유화영(柳華永), 별명은 유림·고상진(高尙眞)이다.


선생이 받은 교육은 가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식교육으로 이어졌다. 우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이어 서당 교육을 받았는데, 9세에 사서삼경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다녔다.


이 학교는 1907년에 개교하여 1회생이 1911년 3월에 졸업했는데, 선생이 다닌 시기가 1910년 무렵으로 전해지는 만큼, 1회생들과 같이 다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유인식·김동삼을 비롯한 설립 주역들과 신민회의 이관직 등이 학교를 운영하던 시기에 다닌 것이다.


특히 유인식이나 김동삼은 인생 행로를 결정짓게 만든 스승이었고, 그 영향 아래 선생은 장차 해외 망명과 독립운동이라는 ‘앞 길’을 개척해 간 것이다. 경북 북부지역 계몽운동의 물꼬를 튼 협동학교는 안동의 척사적인 전통 유림사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유인식은 김동삼과 더불어 바로 그 선두에 서 있었다. 혈연으로 유인식은 선생의 조카뻘이었으나, 나이와 학문에서 유인식은 선생의 큰 스승이었다.


유인식은 안동지역의 근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면서, 성장과정에서 선생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서양문화를 접하게 된 것도 그가 설립한 협동학교에서였다. 1907년에 개교한 이 학교가 외국지지·화학·생물 등 서양문화를 교과과정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딘 시기는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때였다. 경술국치의 소식을 접한 선생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고 ‘단지혈서(斷指血書)’했다고 한다. 이 같은 선생의 행동에는 협동학교의 교육을 통해 성장해온 민족의식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림 유품 사진# 3.1운동 동참한 후에 가산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


선생이 협동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여러 스승과 선배들이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자신이 살던 집을 협동학교에 기부하였던 김대락과 그의 아들 형식·조카 김동삼 형제 등 의성 김씨 집안, 이상룡이 이끄는 고성 이씨 집안 등이 먼저 출발하였고 유인식도 뒤를 따랐다. 이 상황에서 선생은 국내에서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11년 협동학교 졸업 이후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계몽운동이나 비밀결사 조직에 나선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동참하여 갔다. 선생이 참여한 시위는 경북에서도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인 안동의 임동면 편항(鞭巷) 장터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편항 장터 시위는 시작되자마자 바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부수고 일제 경찰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던져 버리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이 시위는 선생이 졸업한 협동학교 생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는데, 선생도 이 시위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을 겪으면서 선생은 해외 망명을 준비하였다.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기로 작정한 데에는 국내활동이 어렵다는 판단과 스승과 선배들의 동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선생은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동반하고 만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선생은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던 선생은 가족들을 여기에 남겨둔 채로 1919년 말에서 1920년 초 사이에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하였다.


이곳에는 1911년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이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계열 인물들과 주축을 이루어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서로군정서로 이어지는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합류하던 무렵 선생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남아 있던 나머지 재산도 모두 매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서로군정서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일본군의 소위 간도출병으로 경신참변이 자행되려는 시기에 그곳을 떠난 것이다. 선생은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에서 신채호와 김창숙을 만난 선생은 당시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고(天鼓)>의 발행을 도왔다. 이 무렵 선생은 한창 아나키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던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생이 아나키즘을 수용한 곳은 북경이요, 시기는 1921년부터 1년 남짓하며 창구는 신채호라고 생각된다.


유림 사진#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타율 정부를 배격하고, 자율 정부를 세우자는 이념.”


그러면 아나키즘(anarchism), 즉 무정부주의란 무엇인가. 선생의 말에 의하면,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그리이스 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다. 본래 ‘안(an)’은 없다는 뜻이고 ‘아키(archi)’는 우두머리·강제권·전제권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일제시기 아나키즘은 강제적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독립운동 이념으로 기능했다고 생각된다.


# 중국 사천성 성도대학에서 공부. 관비 지원 받기 위해 중국인 이름처럼 ‘고상진’이라고 개명


아무튼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당초 목표로 정한 학문 수학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아나키즘을 수용하면서 학문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인 것 같다. 학교는 내륙 깊숙한 곳인 사천성 성도(成都)에 자리잡은 성도대학으로 정했다.


학문 수학을 위해 선생이 당면했던 과제는 학비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생은 관비생이 되기로 작정하고, 중국인으로 행세해야만 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학교에 관비생으로서 수학하기 위해 이름을 고상진으로 개명”했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선생은 성도사범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니면서 졸업한 뒤에 프랑스로 유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선생은 프랑스어를 선택 수강하였고, 중국정부의 학자금 보조도 받는 등 유학을 준비해나갔다고 한다. 선생이 영어만이 아니라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였고, 또 에스페란토에도 능숙했다고 한다. 이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를 선택 이수하며 다양한 외국어를 익힌 유학시절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유학하는 동안 북경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결집체가 구성되었는데, 선생은 여기에서 제외되는 아쉬움은 감수해야 했다. 즉 1924년 4월말 북경에서 이회영·이을규·이정규·백정기·유자명·정화암 등이 결성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이 성도에서 대학을 졸업한 시기는 1926년 초였다. 1922년에 상해·북경을 떠난 선생이 다시 상해에 나타난 시기가 1926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성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 내륙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정 중에 선생은 북경에서 김두봉과 신채호가 쓰고 있던 <한글말본>과 <조선말본>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유림 유묵 사진# 대회 앞두고 평양에서 체포…아나키스트의 험난한 길


그 후 선생은 1927년 1월 무렵 길림에서 김종진을 만났다. 당시 그는 길림에서 이을규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을규가 온다는 전제 아래 두 사람은 운동 방향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중동선(中東線)을 활동 중심지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이을규가 그곳에 도착하자, 이들 세 사람은 중동선으로 출발하였다. 돈화와 눈 덮인 경박호를 횡단하고, 동경성과 영고탑을 거쳐 2개월 만인 1927년 3월 하순에 목적지 중동선 해림역(海林驛)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해림소학교에서 김좌진이 이들을 위한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신민부의 본부를 방문한 것이고, 또한 그 핵심세력들과 만난 것이다.


이후 선생은 김좌진과 여러 차례 격론을 벌였는데, 그것은 당시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가 벌이고 있던 갈등을 해결하는 방향이었다. 선생은 김좌진에게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라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좌진은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과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오는 무슨 이념이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내세웠다. 때문에 몇 차례 격론이 벌어지다가 끝내 선생은 길림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좌진과의 논쟁에서 합의점 도출에 실패한 선생은 해림을 떠나 다시 정의부가 있던 길림성 화전현으로 돌아 왔다. 정의부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 이 지역에 재집결한 군사조직들이 통군부(1923. 6)·통의부(1923. 8)·재만통일회의(1924. 7)를 거쳐 1925년 1월에 조직된 것이었다. 정의부의 핵심 인물 가운데에는 안동 출신 김동삼이 있었다. 선생은 정의부에서 주로 교육관계의 일을 담당하였다. 때문에 선생은 해림에서 그 해 7월에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에 가담하지 못했다. 화전으로 돌아온 선생은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1925년부터 조직화하기 시작한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전국 각지에 단체를 결성하고,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조선흑색사회주의운동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갑룡이 중심이 된 관서흑우회가 준비를 맡았는데, 대회를 앞둔 11월 7일부터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아 중지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도 11월 7일 밤 평양에서 체포되어 연일 취조에 시달렸다. 신민부나 한족총연합회와의 관련성에 대해 취조 당했을 것이다.


일제 경찰은 엄밀한 조사를 벌였지만, 선생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경찰서 형사를 동행시켜 선생을 봉천으로 추방하였다. 사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집요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노출되지 않았던 사실이 2년 뒤인 1931년 원산에서 터진 조그만 사건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선생이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즉 1929년 10월 23일 선생을 비롯한 이홍근·최갑룡·조중복·임중학 등이 평양 기점리에 있는 송림에 모여 회합을 가지고, 11월 1일 다시 그 자리에 모여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강령을 결의하였다.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할 것.

2. 현재의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지방 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건설을 기할 것.


이어서 이들은 각 지역에 대한 활동을 분담했다. 선생은 만주 방면, 이홍근과 최갑룡은 관서 방면, 조중복과 임중학은 함북 방면, 그리고 뒤에 가입하기로 되어 있던 김정희와 차학로가 함남 방면을 각각 맡기로 했다. 경찰에 체포됨에 따라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주역들은 결성된 조직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제34회 의정원 의원 일동 기념촬영 사진(1942)# 만주에서 의성학원 창립, 선생이 직접 영어 가르쳐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제 경찰에 쫓긴 상당수의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 왔다. 이에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체포될 때까지 선생은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수합하여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창립했다. 이 학교는 중국의 각급 학교 입학을 위한 예과 과정으로 오직 선생의 출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한인 유학생의 중국학교 입학을 알선하면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학교는 1929년 설립 당시에는 초급 중학과정이 중심이었으나, 1931년 무렵에는 고등 중학과정으로 바뀐 것 같다. 1931년 10월 체포되는 순간까지 선생은 여기서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는데, 이 학교는 나중에 중국 국민당 좌파가 운영하는 대학 예과수준의 평단(平旦) 고급중학과 병합되었다고 한다.


# 아나키즘(무정부주의)운동했다는 죄목으로 일제로부터 6년 옥고 치른 후 두 번째로 중국 망명


의성학원 운영에 몰두하고 있던 선생은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0월 초에 체포되었다. 선생이 체포된 이유는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원산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된 선생은 ‘원산흑색사건’이라는 명목으로 이홍근·최갑룡·김정희·임중학·조중복·강창기·안봉연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체포된 지 1년이 훨씬 지난 1932년 12월경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3월 2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홍근이 6년형, 선생을 비롯한 최갑룡·조중복·임중학 등이 5년형, 김정희 4년형, 강창기·안봉연·한용기 등이 2년형을 받았다.


유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당선증이들은 모두 항소했다. 형량을 줄여보겠다는 기대보다도 서울의 형무소에 가면 독서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서울로 이송된 선생 일행에 대한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 판결은 원심과 같았고, 이어 7월 6일에 열린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도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선생은 1937년 10월 8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곧 2차 망명길에 올랐다. 1937년 10월 말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석 달이 지난 무렵이다. 이 시기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이청천이 이끌던 한국독립당군은 1934년에 이미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여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고, 왕성한 투쟁을 벌이던 조선혁명당군도 1934년 양세봉 사령관의 전사 이후 소멸되어 가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2차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선생은 2차 망명 후 남북 만주를 돌며 재기를 꿈꾸다가 한계를 느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북경과 천진 일대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에 진력했다고 한다.


# 중경 임시정부에 동참하여, 의정원 의원으로 일해


그러다가 1942년 10월 중경 임시정부 거리에 선생이 나타났다. 일찍이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잠깐 머물렀고, 또 성도에 유학하다가 돌아오던 길에 들렀던 1926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스쳐 지나갔던 선생이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을 넘어 임정에 참여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중경에 선생이 등장한 첫 기록은 1942년 10월 20일이었다.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서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이연호·김상덕·이정호·한지성 등 6명을 경상도 출신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한 것이다. 이어서 10월 24일에는 선생에게 당선증이 주어졌다. 이 명단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당시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이루고 있었다. 1940년 5월 우파세력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고, 9월에는 한국광복군을 결성했으며, 1941년 11월에는 광복을 전망하면서 건국강령을 선포하였다. 당·정·군 체제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임정의 주변에는 민족주의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 공산주의 세력인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아나키즘 계열인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이 먼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여기에 참여함에 따라 좌우합작을 달성했는데, 바로 그 때 선생이 중경에 도착한 것이다.


유림씨 중심으로 독립노농당 결성’ (동아일보 1946년 5월 11일자) 기사 사본선생이 중경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은 임시정부에 동참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도착해 보니 마침 좌우합작이 이루어진 상태라서 선생의 임시정부 참여는 자연스런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이유는,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민족의 당면한 과제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그러한 조직을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임시정부에서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의 임시정부 참가는 또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인식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선생과 유자명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의 대표로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여 갔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생은 임정의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여 갔던 것이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당선증을 받은 다음날, 즉 1942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제34회 의정원회의에 출석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5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선생의 활약은 크게 정부 차원과 비정부 차원의 일로 나누어진다.


정부 차원의 일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활동과 국무위원으로서 활동이 있다. 의정원 의원으로서 끄집어낸 첫 문제는 아나키스트 나월환 암살 용의자들의 처리에 대한 강경한 발언이 주목된다. 즉 임시정부가 나월환을 암살한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 국민당정부에 요청했다는 소문의 사실 여부를 캐묻고 나섰다. 아나키스트인 암살 용의자들을 극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며 구명을 요구한 것이다.


# “모든 독립 운동의 역량을 임시정부로 총집중해야 합니다.”


다음 해인 1943년 2월 선생은 외교위원회 연구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그 해 4월 임시정부에 선전부가 만들어지면서 조소앙·신익희·엄항섭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약했다. 1944년 4월 선생은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어 이듬해 12월 1일 귀국할 때까지 국무위원으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남아 있는 선생의 발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945년 4월 11일 37차 의정원 개원식을 겸해 열린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수립 26주년 기념식 축사이다.


유림선생이 가족들과 함께 창경궁에서 찍은 사진(1947.5)선생은 여기에서 정부와 의정원이 3.1운동의 결실로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과 한 덩어리가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 모든 독립역량을 임시정부로 총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정부와 의정원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고쳐야 하고 구성원들도 목전의 임무를 위해 특권을 요구하지 말고 3.1운동 당시처럼 자유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임시정부에서 선생의 주장은 항상 광복 전열의 통합과 운동 역량의 집중 및 자유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정부 차원의 활동에도 선생은 적극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43년 5월 10일 중경에서 열린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로 참가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의 영수가 전후 한국을 독립에 앞서 국제 보호 아래 두기로 했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중국에 있던 각 당파 대표자를 중심으로 동포 3백여 명이 중경에서 대회를 열고 “한국은 완전 독립하여야 한다. 외국의 어떠한 간섭이라도 반대한다”는 요지의 강연과 토론을 가진 뒤 4개항으로 된 선언을 발표했다. 이 때 선생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로서 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원,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한국애국부인회의 김순애, 한국청년회의 한지성 등과 더불어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한·중 양민의 민간 기구인 중한문화협회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 광복 후 환국하여 독립노농당 창당, <노농신문> 창간


광복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환할 때 제2진에 속했다.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출발한 일행은 1진보다 8일 늦은 12월 1일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악천후로 서울 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어 군산을 통해 귀국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환국 이후 선생은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1일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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