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3] 일제의 은사금 거부하고 단식 순국한 '장태수'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2 06:44:21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장태수, 1841 ~1910, 독립장 (1962)

“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不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 순국 당시 선생의 유언 중 -



식년문과 급제 후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에 항거하여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

관직 복귀 후 목도한 경술국치, 또 다시 낙향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단식 순국하다


# 식년문과 급제 후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


선비가 불의와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처신하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불의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거의론(擧義論)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며 도(道)를 지키는 거수론(去守論)이요, 마지막 하나는 목숨을 바쳐 불의에 저항하는 치명론(致命論)이다. 한말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거의론은 의병항쟁으로, 거수론은 전통 한학의 전수를 통한 민족교육운동으로, 치명론은 의열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의열투쟁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침략자와 그 앞잡이를 처단하거나, 침략 행위에 대해 항거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독립운동 방략을 말한다. 국망의 위기 속에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한국 병탄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홍범식, 황현, 김도현, 이만도, 김석진, 송병순, 그리고 장태수(張泰秀, 1841. 12. 24 ~ 1910. 11. 27) 선생의 의열투쟁도 그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하였고, 그럼으로써 의열투쟁은 물론 구국운동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선생을 고산 현감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칙지(1984년)장태수 선생은 1841년 12월 24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서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인동,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남강거사(南岡居士)이다. 부친은 장한두(張漢斗)로 첨중추(僉中樞)를 지냈다. 1861년 선생은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선생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한학의 수준도 매우 높았던 것 같다. 


과거 급제 후 선생은 외교문서를 작성, 보관하던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이후 선생은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장령, 예조정랑 등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그리고 1867년에는 목민관인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민생안정에 힘쓰고, 부국양병에 주력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한 공이 있었다. 이 같은 공덕으로 통정대부에 오른 선생은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개성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선생은 병조참의, 동부승지, 춘추관 수찬관을 지내는 등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외직인 고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장태수 선생 유물 조복#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에 항거하여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


그 해 6월 21일 일제는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곧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여 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反)외세, 반(反)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한국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봉쇄하고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을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따라서 개항 이후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양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승전의 도취감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할양 받은 요동(遼東)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위약성을 간파한 민씨세력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이이제이식(以夷制夷式)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여 갔다. 이에 일제는 지속적인 자국 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1895년 8월 20일 반일의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뒤따라 일제가 친일 김홍집내각을 사주하여 그해 11월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이에 항거하여 선생은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스스로 남강거사를 칭하며 은거하였다.


일유재고# 관직 복귀 후 목도한 경술국치, 또 다시 낙향


그러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 일제가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여 가자 선생은 다시 관계로 나갔다. 조정에서 복귀에 대한 여러 번의 권유도 있었지만, 국망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는 선생의 의지가 작용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원부경이 되었고, 종묘와 사직을 보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대신들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리게 된다. 그리고 중추원 의관으로 전임되어서도 ‘을사5적’의 처단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이완용 매국 내각의 책동으로 경술국치의 비극을 당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서강사 모습“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犬馬猶能懷主德 賊臣何忍賣君欺)”


경술국치 후 선생은 통곡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하였다. 또한 의관을 정제하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이 지냈다고 한다.


#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단식 순국하다


당시 일제는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것을 수여하여 한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회유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획책하였다. 선생에게도 일제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고 호통하여 쫓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헌병이 찾아와 위협하며 은사금 받기를 강권하였지만, 선생은 끝내 항거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말과 함께 곡기를 끊고 단식을 결행하였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위치한 남강정사(南崗精舍)“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不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이 말에는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던 선비가 그것을 모두 잃었다고 하는 자괴감과 일제에 대한 분노가 잘 드러나 보인다. 결국 선생은 단식 24일만인, 1910년 11월 27일 순국하고 말았다. 단식 순국을 통해 선생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선비로서 충과 효를 다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