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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2] 일본군, 호남 초토화하는 ‘남한대토벌작전’ 전개 나섰다가 이슬처럼 순국한 '오성술'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2 06:28:03
  • 수정 2023-12-02 06: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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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오성술, 1884 ~1910, 독립장 (1977)


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에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

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 선생이 의병활동 중 읊은 시 -


# 나이 스물 한 살 때 충의참봉이 되고 나자 을사늑약 체결


오성술(吳成述, 1884.5.15 ~ 1910.9.15) 선생은 1884년 5월 15일 전라남도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吳榮善)과 나주 임(林)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인수(仁洙), 자는 성술(聖述), 호는 죽파(竹坡), 본관은 나주이다. 선생의 가문은 전형적인 지방 양반가였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윤택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부친이 참봉 벼슬에 있었으며, 훗날 선생이 거의할 때 50여 두락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선생은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에 더욱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은 그 시절 양반가의 자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익혔다. 여덟 살 때부터 인근의 유생 후송(後松) 양상하(梁相賀)로부터 한문과 유학의 기초 지식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세 때부터는 집안 숙부 뻘 되는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이 강학하던 용진정사(聳珍精舍)에서 한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당시 오준선은 장성의 기우만과 쌍벽을 이룬 호남의 거유로서 도학과 문장이 높았다. 특히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광주 용진산에 있던 용진정사는 운치가 좋아 많은 시인묵객들과 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선생은 여기에서 수학하면서 이들 내방객들과 사귈 기회를 자주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용진산은 후일 선생의 의병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또 이때 사귄 인사들이 의병부대의 주된 인적 자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사들의 추천으로 선생은 1905년 7월, 21세의 나이에 종9품 충의참봉을 제수 받았다. 때문에 선생은 이후 오참봉으로 불렸고, 선생의 의병부대는 오참봉 의병부대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태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호시탐탐(虎視耽耽)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여순항(旅順港)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이를 기화로 일제는 같은 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다. 즉 같은 해 8월 22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같은 해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 등 일련의 국제적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 받았다. 그 뒤 곧바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였다. 즉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러일전쟁 중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법 주둔시킨 2개 사단의 일본군을 기반으로 군사 계엄통치까지 자행하면서 우리나라를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 최익현 선생의 시국강론 듣고 나서 의병 거의 결심. 부친이 전답 팔아 군자금 대줘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전개되자 면암 최익현은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고, 그에 동조한 매국대신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구국 의병항쟁을 주창하였다. 나아가 1906년 1월에는 충남 노성 궐리사(闕里祠)에서 각지의 유림을 모아 강회를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평소 최익현을 존경하던 선생도 여기에 참석하여 강론을 듣고 창의를 결심하게 되었다. 선생은 강회가 끝난 뒤 최익현을 만나 창의 의사를 밝히자 최익현은 대견해 하며,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國勢民計)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성술 선생 판결문(1910.07.16, 대구공소원)강회 참석 후 귀향한 선생은 곧바로 거의 준비에 들어갔다. 병서를 탐독하며 병법을 익히고,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병항쟁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선생은 부친에게 “국가흥망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 면암 선생의 뒤를 따라 국적(國賊)을 몰아내고자 하오니 거의에 필요한 자금을 승낙해 주십시오.”하고 진언하였다. 부친은 선생의 뜻에 전적으로 찬동하여 50여 마지기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선생은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드디어 1907년 2월 선생은 격문을 띄우고 거의함으로써 구국 의병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수학하던 용진산을 근거지로 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진을 편성한 것이다. 이때 짜여진 의병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대장 오성술

도통장 오상렬(吳相烈), 선봉장 김성현(金聖鉉), 중군장 오원규(吳元圭)

도포장 김봉선(金奉先), 호군장 이종석(李鍾晳), 후군장 양치홍(梁治洪)

좌익장 오성범(吳聖範), 우익장 양지술(梁志述)

소모장 정중회(鄭中會)·김경천(金京天), 운량장 김목사리

군기감 나만국(羅萬國)·오일선(吳日善) 서기 겸 모사 오재두(吳在斗)


의병부대 규모는 그 해 7월경에 이르면 각지에서 몰려든 의병들로 500여 명에 육박하여 갔다. 또한 도통장 오상렬과 도포장 김봉선의 지휘 아래 납과 구리를 구해 와 탄환을 제작하였고, 중군장 오원규의 지도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일본군과의 격전을 앞두고 전투력 강화에 만전을 기한 것이다.


# 총포와 탄환 준비하고 용진산에서 거의. 김태원 의진과 합세, 고창 영광에서 일군 격파


그럴 즈음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태원이 합진을 제의해 왔다. “창의 목적이 똑같은데 제 각기 흩어져 싸우면 적에게 허점만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 김태원 의병장의 논리였다. 이에 선생은 참모회의를 거쳐 합진을 결정하였다. 이때 같은 참봉이며 양반 유생의 신분으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14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의형제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김태원 의병장과 함께 활동하면서 1907년 9월 기삼연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편성된 호남 의병부대의 연합의진인 호남창의회맹소에도 참여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선임된 김태원 의병장 막료로서 활동한 것이다. 선생은 김태원 의병장의 막료로서 그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나아가 고창읍성을 탈환하는 데도 동참하였으며, 특히 12월 7일 김태원 의병장이 앞장선 호남창의회맹소의 영광 법성포 탈환전에도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법성포는 조기어장과 세곡미의 운송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일본인들을 위한 경찰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등도 갖추어진 곳이었다. 선생을 비롯한 의병들은 이같은 법성포를 공격하여 탈환한 뒤, 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를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그럼으로써 일제 침략세력에게 철퇴를 가한 것이다.


# 호남평야 수탈에 나선 일본인 지주들 농장에 불 질러


호남창의회맹소는 법성포 공격 직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게 되었다. 선생도 이때부터 독립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침투하여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공격하였다. 당시 일본인 실업가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우리 실업가들이 어떠한 산업적 개발에도 착수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병사들을 돌려보낸다면 결국 승전은 아무런 역할도 못한 것이다.”라고 하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러일전쟁 직후 한국에서 경쟁적으로 토지를 점탈하여 농장을 설치함으로써 미곡 수탈에 앞장섰다. 이로부터 일본인 지주들은 식민 농업수탈의 전위대로 활동하면서 한국 농민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성술 선생의 사형 집행 사실을 알리는 <조선총독부관보>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선생이 일찍 광주에 들어와 농업 수탈을 자행하고 있던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습격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1908년 1월 10일 밤 선생은 2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광주군 마지면 반촌에 있는 일본인 지주 좌구간시삼랑(佐久間時三郞)의 농장을 습격하였다. 즉 농장 지배인 재등일(齋藤一)의 집에 총격을 가하여 그의 처와 아들, 그리고 딸 등을 처단한 것이다. 그런 다음 집안을 수색하여 총기․도검 등 무기류를 노획하고, 농장 가옥과 곡물·가축 등을 불태워버렸다. 이듬해 1월 31일에도 선생은 25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주군 대지면 전촌에 있는 일본인 지주 삼십내(森十內)의 농장을 재차 습격하였다. 이때 선생의 의병부대는 농장 가옥과 창고, 그리고 수탈 곡물 등을 불질러 버림으로써 농업 수탈에 앞장선 일본인 지주를 응징하였던 것이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 격화하자 일제는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던 기삼연 의병장이 순창에서 붙잡혀 1908년 2월 2일 광주 백사장에서 총살, 순국하고 말았다. 또한 선생과 결의형제를 맺은 김태원 의병장도 4월 25일 광주 박산동 어등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그리고 3월 19일 광주 정동전투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던 김태원의 동생 김율 의병장도 일본군에 의해 어등산으로 끌려가 형의 시신을 확인한 뒤, 잔인하게 학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창의대장 기삼연과 호남창의회맹소에서 가장 용맹을 떨쳤던 두 형제 의병장의 순국 소식은 의병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의병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활동하면서 필요할 때 다른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분산하는 방식의 전술을 채택하였다. 당시 이러한 이합집산의 유격방식은 의병부대들이 흔히 구사하던 전략 전술이었다. 이는 한층 강화된 일본군의 탄압에 대응하면서 전과를 올릴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전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선생은 수시로 전해산 의병부대, 심남일 의병부대, 안규홍 의병부대 등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갔다. 예컨대 1908년 7월경 선생은 전해산 의병장과 만나 합진을 결의한 뒤, 그달 27일 광산군 적량면 석문산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 함평 대명동 전투에서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군 7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석문산 전투 직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나주군 문평의 용문산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그것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 선봉장 김성현의 집이 용문산에서 가까운 나주군 거평면 도장골에 있어 나주와 영산포에 배치된 일본군의 동정을 정탐하기에 적합하였고, 선생의 처가 또한 거평에 있어 여러 가지 지원을 받는 데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 친일 주구배들 소탕하고, 다른 의병부대와 합동 공격으로 나주 거성동 일군 격파


나주 용문산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선생의 의병부대는 친일 주구배의 처단에 나섰다. 당시 친일 밀정들이 의병부대의 동정을 일본군에 알려줌으로써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밀정 노릇을 하며 일반 민중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원성을 샀던 황도현(黃道玄)을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12월 29일 선생은 3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나주군 이노면 신기촌의 황도현 집에 당도하여 그를 체포한 뒤, 관동면 봉동 산중으로 끌고 가 총살,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이듬해 2월 4일에도 선생은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나주군 신촌면 곡룡동에서 친일 밀정 나귀종(羅貴宗)을 잡아 처단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 또한 멈추지 않았다. 선생은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을 내려갔던 선봉장 김성현의 보고를 받고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습격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고막원 헌병분파소 일본군과 보조원들이 양력설을 맞이하여 휴가 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곧 선생은 전해산 의병장에 사람을 보내 1909년 1월 1일 합동작전으로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전해산 의병장은 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도착함으로써 합동 작전의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호남창의동맹비드디어 1월 1일 새벽 3시 선생과 전해산의 연합 의병부대는 계획대로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였다. 예상대로 일본군 헌병들은 휴가로 없었고 헌병 보조원들만이 있었다. 연합 의병부대는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장악한 뒤 2명의 헌병 보조원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는 일제의 허를 찌른 통쾌한 기습 작전의 성공이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다시 광주 용진산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일본군의 수색 작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처럼 의병부대는 우수한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일본군과 대결하기 위해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초 호남지역 의병장들은 심남일 의병장의 주선으로 전략회의를 열었다. 일본군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니 합동작전을 벌여 그 기세를 꺾자는 의도에서였다. 이 전략대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3월 8일 나주군 남평면 거성동에서 심남일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선생의 의병부대는 때로는 안규홍 의병부대와 때로는 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일본군, 호남 초토화하는 ‘남한대토벌작전’ 전개. 의병들, 결사항쟁에 나섰다가 이슬처럼 순국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그해 7월 20일 함평 대명동에서 다시 한 차례 매복전을 펼쳐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한 뒤, 다시 나주 용문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가 본토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임시한국파견대를 편성하여 호남 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던 시기였다. 특히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 계획을 세워놓고, “사방에 그물을 치듯이 해놓고 촌락을 샅샅이 뒤지던” 시점이 된 것이다.


결국 1909년 8월 영산포헌병대는 선생의 의병부대가 용문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파견하여 추격하여 왔다. 요시무라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헌병 ‘폭도토벌대’에 맞서 선생을 비롯한 30여 명의 의병부대는 “최후의 하나까지 싸우다 죽자”고 하면서 결사 항전을 결의하였다. 그렇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선생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영산포헌병대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07년 이래 3년간 광주·나주·담양·함평·고창 일대를 누빈 선생의 항일 의병투쟁이 끝나고 만 것이다.


이후 선생은 기유각서에 의해 일제가 사법권을 장악한 뒤인 1909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그러나 복역 중 살인과 방화죄가 추가되어 이듬해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가족들이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16일 기각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선생은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불과 26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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