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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1] 홍범식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2 06:12:07
  • 수정 2023-12-02 06: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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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홍범식, 1871 ~1910, 독립장 (1962)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1910. 8. 29) 


# 군수로 재직하며 선정을 베풀다


일완(一玩) 홍범식(洪範植, 1871. 7. 23 ~ 1910. 8. 29) 선생은 1871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일완, 자는 성방(聖訪)이다. 선생의 가문은 사도세자 비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였다. 직계 가족 또한 조부 홍우길은 185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부친 홍승목은 1875년 별시 문과 급제 후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집안이었다.


이 같은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며,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선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2년에는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선생은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는 매우 비분강개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1907년 선생은 태인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태인군에서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군수로 부임한 선생은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 나아가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일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이에 감동한 군민들이 마을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수가 38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선생의 인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도 정주시 산외면 오공리 야정 마을에 남아있는 ‘군수 홍범식 선정비’이다.


# 1910년 8월 29일 발표된 한일병합조약


1909년 선생은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爲民行政)을 폄으로써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이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조국의 운명은 망국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금산 군수 시절 선생의 사진이를 통하여 일제는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한 의병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함으로써 한국 병합의 최대의 장애 요소를 제거한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일제는 한국 병합의 시기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발생하였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한국 내의 주요 민족운동자들을 체포, 감금함으로써 계몽운동의 지도 역량까지 약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해 12월 이재명 의사에 의해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기화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강제 한일병합 정책을 추진하여 갔다. 즉,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곧바로 일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병합에 관한 상주문과 청원서, 성명서를 발표케 하였다. 마치 한국 민족이 한일병합을 원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작하여 간 것이다.


일본은 이듬해 5월 일본 정부 내에서 과격파에 속하는 현역 육군대장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 6월에는 한국의 경찰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외교, 군사, 사법권에 이어 경찰권까지 빼앗긴 것이다. 데라우치 통감은 이 같은 토대 위에서 1910년 7월 부임하여 오자마자 곧바로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일병합에 관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8월 16일 이완용에게 ‘한일병합조약’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8월 18일 각의와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황제로 하여금 공포케 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살펴 상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를 위해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사내정의를 각기 그 전권위원으로 임명함. 


홍범식 순절비이에 따라 이 전권위원은 회동, 협의하여 다음의 제조문을 협정함.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함.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인함.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그것을 약속함.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 황제와 그 후예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함.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에 대하여 특히 표창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 영작을 주고 은급을 수여함.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전연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에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충실히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하는 한 한국에 있어 제국관리에 등용함.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선생은 금산군수로 재임 중에 이 같은 한일병합조약의 조인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는 자결,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8월 29일 드디어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자 이날 저녁 선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주어 집으로 돌려보낸 뒤, 관아의 객사로 갔다. 그리고 시종하는 고을 사령을 밖에 머물게 하고는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선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다른 곳으로 향해 갔다. 고을 사령이 다시 뒤따라가자 선생은 그에게 모래를 뿌려 앞을 못 보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선생의 유묵한편 집으로 간 김지섭은 선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에 경악한 김지섭은 선생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선생을 찾고 있던 고을 사령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객사 주변을 나누어 수색하던 중 “여기 나으리가 계시다”라는 외침을 듣고 달려가 보니, 선생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자는 듯 편안한 자세였다고 한다.


순국 당시 선생의 나이는 갓 마흔에 불과하였으니, 그 애절하고 원통함이 더욱 컸다. 선생이 품고 있던 유서는 염탐하던 일본인이 탈취해 갔으나 김지섭에게 미리 맡겨 놓은 것은 장남에게 건네졌다. 유서는 모두 10여 통으로, 선생의 조모를 비롯하여 부친과 부인, 그리고 여섯 명의 자녀와 장손에게 남긴 것이었다. 특히 선생은 장남에게 남긴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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