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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56] 충익공 신경진 묘역 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2-02 00: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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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95호 충익공 신경진 묘역-유형문화재 제96호 문희공 유창 묘역-유형문화재 제97호 오공신회맹축

[박광준 기자] # 충익공 신경진 묘역

유형문화재 제95호


충익공 신경진 묘역(忠翼公申景禛墓域)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5호다. 신경진 신도비는 조선왕조 인조 때의 명신 신경진(1575∼1643)의 신도비이다. 비문에는 고려 왕건의 충신이던 신숭겸(申崇謙)과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신개(申槪) 등 그의 선조에 대해 약술돼 있고, 이어 광해군·인조 때 활약한 그의 행적이 적혀있고, 말미에 부인과 자손의 명단 및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1995년 1월 25일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했다. 


신도비 1기(基), 전체 높이 368cm, 비신 높이 189cm, 너비 99cm, 두께 32cm, 묘갈(墓碣) 1기,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보호구역 4,088m2 , 재료 비신.개석 대리석, 귀부 화강암로 구성돼 있다. 


신경진 묘역 전경/사진-문화재청신경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자결했던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큰아들이다. 부친의 공적으로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됐고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력(經歷)으로 승진했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발탁되나 왜인과 접할 수 없다고 해 면직을 주청, 갑산부사로 체직됐다. 그 뒤 남도병영 우후(虞候), 경원부사, 벽동군수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됐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돼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했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돼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 때 훈련대장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興安君)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형조판서가 돼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조판서가 됐으나 병 때문에 체직됐고, 그 해 겨울 오랑캐가 침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인조를 따라 산성의 동쪽 문을 굳건히 지켰다. 


이듬해 다시 병조의 일을 맡았고,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됐다. 163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에 은밀히 파견해 청(淸)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했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고, 1642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된 지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신경진신도비/사진-문화재청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해 왕의 절대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해 호위를 책임졌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다. 특히 부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金汝 )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효종 2년(1651) 인조의 묘정에 배향됐다. 묘소는 원래 청주 땅에 있었으나 뒤에 경기 양주의 아차산으로 개장됐다.


비는 화강암 귀부(龜趺)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얹은 형태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귀부는 비신에 비해 크고 둔중하고, 개석은 추녀 끝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지붕 위에 쌍룡이 틀고있는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전(前)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글씨는 사간원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썼는데 안진경(顔眞卿) 풍이 가미된 단정한 해서이다. '領議政平城府院君忠翼申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 문희공 유창 묘역

유형문화재 제96호


문희공 유창 묘역/사진-문화재청문희공 유창 묘역(文僖公 劉敞 墓域)은 조선 초기의 문신 유창의 묘와 신도비이다.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해 있고 1995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호이다. 


규모는 신도비 1기(基), 전체 높이 240cm, 비신 높이 142cm, 너비 53cm, 두께 33cm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묘 입구 좌측에는 헌종 12년(1846)에 세운 비가 전한다. 네모받침돌 위에 네모기둥 모양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왓골을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비문은 판의금부사 이광정(李光正)이 지었고, 전 형조판서 이의익(李宜翼)이 썼고, 두전(頭篆)은 진잠(鎭岑) 현감을 지낸 14대손 유석(劉錫)이 썼다.


# 오공신회맹축

유형문화재 제97호


'오공신회맹축'은 조선 세조 2년(1456) 11월 14일에 왕세자와 개국공신(開國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의 친자식과 맏아들의 자손들, 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佐翼功臣)과 그 자식들이 북단에 모여 동맹할 때 작성한 회맹문이다.


개국공신은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는 정도전 등 43명에게 내린 공훈이고, 정사공신은 태조 7년(1398)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제2대 정종 때 의안대군 등 17명에게 내린 공훈이고, 좌명공신은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로서 태종 1년(1401)에 46명에게 내린 공훈이다. 


오공신회맹축/사진-문화재청정난공신은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이 주동해 황보인.김종서 등의 무리를 죽이고, 그들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모함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종이 김종서 등을 죽이는 데 공을 세운 43명에게 준 공훈이다.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로서 세조 1년(1455)에 모두 44명에게 내린 공훈이다.


이 공신록의 내용은 오공신과 그 자손에게 내려준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동심협력해 국은을 갚기에 힘쓸 것과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공신 자손간에도 단결하고 협력할 것을 신명에 맹세한 것이다.


이 공신록의 크기는 세로 54cm, 길이 620cm의 두루마리로 돼 있는데, 앞부분 약 4.5행(88자)이 훼손, 탈락돼 있다. 탈락된 내용은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실려 있어 복원할 수 있었다.


이 문서의 맨 앞부분에는 199자로 된 회맹문이 있고, 바로 이어 회맹에 참가한 왕자와 공신 자손의 군호.공신호.직함.성명과 수결이 있다. 양녕대군을 포함한 3대군과 9군, 226명의 공신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178명이 수결을 했다.


이 문서는 현존하는 공신회맹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당시 오공신과 그 자손들의 동향 및 조선 초기의 정치인물들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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