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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공사, 성인 단행본 ‘붉은 궁’ 출간
  • 이승준
  • 등록 2023-10-27 17: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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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시공사가 허주은 작가의 성인 단행본 ‘붉은 궁’을 출간했다.2022년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허주은 작가가 2023년 에드거 앨런 포 수상작 ‘붉은 궁’으로 돌아왔다. 조선 시대 영조 치하 궁궐을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은 더 깊어진 정치적 음모에 한층 더 풍부해진 서스펜스로, 주인공과 독자가 함께 의문의 살인 사건에 몰입해 추리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로맨스 요소까지 더해져 더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이야기는 1758년 조선, 혜민서에서 네 명의 여인이 살해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녀 ‘현’은 자신의 스승인 ‘정수’가 이 사건과 관련해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조판서인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현은 출신과 성별의 장벽을 느끼고, 의녀가 되기 위해 혜민서에서 밤낮으로 공부해 왔다. 그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정수였다. 현은 정수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홀로 진범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종사관 ‘어진’의 조력을 받게 되고, 그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풋풋한 사랑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어진과 손을 잡게 된 현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왕세자가 사라진 밤, 네 명의 여인이 살해당하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왕세자, 세자빈, 의녀, 다모, 의원, 종사관, 사령관 등 궁궐 내부 인사들이 사실관계를 두고 첨예하게 얽힌다.

사도세자라는 역사적 인물을 기반으로 창작, 출간된 작품들은 이미 여럿 존재한다. 그러나 기존 작품들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에 집중하거나, 뒤주에 갇혀야 했던 세자의 죽음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붉은 궁’은 왕족이 행한 폭력이 한 하층민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에 대해 집중하며, 성별과 신분의 차별에 대항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뿐만 아니라 작가는 왕족 중심으로만 쓰인 역사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왕족이 아닌 성 바깥의 평민들을 보살피는 의녀, 하층민을 치료하는 다모 등 역사의 바깥에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끌어온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하나의 이야기장으로 불러 모은 붉은 궁은 인물 간 다양한 갈등 구도를 통해 심리적 긴장을 부여한다. 주인공 현은 성별과 신분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데, 마찬가지로 영조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세자를 보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자의 잔혹함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한다. 세자뿐 아니라 살인 용의자들의 악한 모습만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까지도 다면적으로 보여줘 과연 누가 진범일지 유추하는 재미를 더한다. 이 밖에도 세자를 끌어내리려는 문 소원, 궁녀와 비밀리에 혼인한 군 의원, 남몰래 복수의 칼날을 다듬어 온 인영 의녀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진범 추적은 더 복잡한 양상이 된다.

혜민서에서의 잔혹한 살인 사건 이후로도 의녀를 표적으로 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공격을 당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경희 의녀의 의미심장한 증언을 토대로 현은 도성 밖 야산으로 향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달라짐에 따라 더더욱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한편,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며 독자는 마치 현과 함께 사건을 풀어나가는 듯한 쾌감을 얻게 된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토록 냉정하게, 이토록 신속하게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그제야 깨달음이 들었다. 혜민서 사건 수사는 나를 죽음의 덫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본문 중에서

“눈을 내리깐 채로 슬쩍 앞을 보았다. 세자는 나를 등지고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와 몸집이 더욱 컸다. 언뜻 봐도 무예에 출중하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비단 곤룡포는, 거대한 바위 위를 흐르는 물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넓은 어깨가 그의 힘을, 한 번의 공격으로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증명했다.” -본문 중에서

현의 수사망이 더 깊숙한 곳을 파고들수록 궁궐 안팎의 팽팽한 권력 싸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것만 같은 세자는 사실 노론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입장이다. 서녀인 현은 천민이지만, 현의 아버지는 노론 대신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조판서다. 이렇듯 현과 현의 아버지, 그리고 세자의 위치는 복잡하게 얽혀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형국이다.

현은 아버지와 포도대장 등 권력자들로부터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라는 압박을 받는다. 동시에 문 소원에게 첩자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현이 문 소원의 첩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수사를 이어가라는 세자빈의 조언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혜민서 사건을 파헤치던 현은 어느새 궁궐 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궁중에서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 한편, 왕족에게 해를 당한 하층민 또한 복수를 꾸미고 있다. 이렇듯 계층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정치 싸움에 갈등은 더 깊어지고, 매 장면이 클라이맥스를 달리는 듯 몰입감이 치솟는다. 복잡하게 얽힌 권력관계이지만 현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풀어내어 풍성한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다. 우리에게는 은밀한 고통과 사랑에 대한 열망이 있다.” -본문 중에서

“나는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었다. 어진과 있다 보면, 내 머릿속에 초대받지 않은 환상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지은이 수집하는 연애소설 주인공처럼, 누군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어떤 느낌일까 꿈꾸게 되었다.” -본문 중에서

복잡한 인물 관계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 현과 종사관 어진의 관계로, 보는 이의 설렘을 절로 자아낸다. 연이어 발생하는 살인 사건에도 진중하게 수사를 이어가던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대할 때만큼은 조금 서툰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풋풋한 10대의 모습을 보인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는 식으로 이뤄졌던 일반적인 조선 시대 남녀상과 달리, 붉은 궁의 러브 라인은 현의 변화에 달려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현은 천대받는 신분의 젊은 여성임에도 능동적으로 사건을 헤쳐 나가고, 어진은 현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합을 맞춘다. 처음에는 신분 차이로 어진을 밀어냈던 현이지만, 궁궐 안에서 겪은 사건을 통해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데 직위와 신분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어진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어진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밀도 높은 서술이 이어지는 와중, 로맨스 요소가 더해져 호흡을 조절시킨다. 영조 시대의 역사·정치적 모습을 긴장감 있게 묘사해 이를 배경으로 치열하게 살고 사랑하는 인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충족된다.

2023년 에드거 앨런 포 어워드 수상, 2022년에는 시카고공립도서관과 뉴욕공립도서관에서 ‘올해의 책’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붉은 궁’은 세계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공신력 높은 여러 시상식에서의 수상 및 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통해 현재 미스터리 역사극 장르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으로 떠오른 붉은 궁. 한국어판에서는 허주은 작가가 밝히는 에드거 앨런 포 어워드 수상 소감, 한국 독자들을 위한 사인 등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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