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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4] 1400년 전 백제인의 숨결이 담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3-31 20: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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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고려시대에 조성된 왕궁리 5층 석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백제계 석탑으로 단층기간,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을 갖고 있고, 1965년부터 1966까지 해체 보수를 할 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은 백제 무왕대 왕궁을 건립해 일정기간 사용 후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확인됐고, 왕궁터의 궁장,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 금당터, 강당터 등이 확인되었다.


▲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1989년부터 발굴조사를 통한 왕궁리 유적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돼 일정기간 시용된 후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며, 이 왕궁은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 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고, 왕궁의 남측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했다. 북측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측은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왕궁의 남측은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의 후원을 배치한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와의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왕궁리 유적 왕궁은 백제 무왕 때에 왕궁을 건립해 왕궁으로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사찰로 바뀌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지됐고, 고려시대는 동남측 일부에서 유적이 확인됐다.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은 백제의 유적으로 1974년 9월 27일 기념물 제1호 모질메산성으로 지정됐다가,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승격, 지정,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됐다.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해체와 보수를 했다. 이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또한 석탑의 건물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이다.  


     ▲ 정전건물터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큰 건물터로 , 건물의 크기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남문터와 함께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다. 건물터의 크기, 건축기법, 위치를 볼 때 내전으로 쓰였거나 조회, 제례를 치르던 건물로 추정한다. 건축기법이 독특하게 커다란 구덩이를 판 후 속에 점토를 단단히 다지고 위에 기둥을 세운 토심 구조로 지었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도 규모와 건축기법이 이와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됐다.


     ▲금당터


금당은 부처를 모시는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왕궁리 유적의 사찰은 백제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궁궐 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한다. 남북 일직선상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건물 안이 막히지 않고 하나로 통하는 통간구조이다. 


     ▲강당터


금당터 뒤에 있는 강당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 크기로 건물 안이 막히지 않고 하나로 되어 있는 통간 건물이다. 강당터 남쪽 약 10m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자리는 지금의 강당터가 있던 때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남쪽 궁궐 담장


남쪽 궁궐 담장은 궁궐을 직사각형 형태로 둘러싼 담장이고, 동서길이 약 240m, 남북 약 490m이다. 폭 3m 정도로, 잘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만들었다. 담장 안팎으로 돌을 갈아 보도를 만들고, 돌을 쌓아 만든 석렬시설을 담장 경계로 설치했다. 딸린 시설로는 물을 내보내는 수구와 배수로가 있다. 왕궁리 궁궐 담장은 문 터가 동쪽, 서쪽, 북쪽에 각 1곳, 남쪽에 3곳으로 모두 6곳이 발견됐다.


▲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 제123호)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1965년 12월 고려시대 석탑인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하던 중에 사리장엄구 일괄이 발견됐다. 사리기(舍利器) 1식과 금제금강경판(金製金剛經版) 19매(각 길이 14.8㎝, 너비 13.7㎝)는 제1층 옥개석(屋蓋石) 상면에 2개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고,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청동요령(靑銅搖鈴) 등은 기단(基壇) 심초석(心礎石)에 있던 ‘品(품)’자형으로 뚫린 3개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 금제사리상자와 유리제 사리병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1층 지붕돌 윗면 사리 구멍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사리상자다. 직사각형 상자에 연꽃 모양 꼭지가 달린 방추형 뚜껑을 덮었다. 청동으로 만든 또 다른 함 안에 들어 있던 이 사리함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있었다. 뚜껑과 상자의 겉면에 구슬무늬(圓文)가 빼곡하고, 방추형 뚜껑의 각 면에는 반쪽의 연꽃무늬와 잎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상자의 각 면에는 세 개의 능선을 가진 꽃무늬를 새겼는데, 꽃무늬 밑에는 바깥으로 벌어지는 짧은 줄기를, 좌우에는 긴 줄기를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유물로 봅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서탑의 금동제 사리외호나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암막새(643년 이전 유물) 무늬 등과 비교하여 백제 후기의 유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왕궁리유적 오층석탑에서 수습된 금제 사리상자에 들어 있던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유리제 사리병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높이는 7.7cm이며, 금제 연꽃 봉오리 마개, 유리병, 금제 연꽃무늬 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좌의 사각형 밑받침 윗면에 새긴 연꽃잎무늬의 촘촘한 새김선은 공주 무령왕릉의 은제 잔이나 익산 미륵사 터 서탑의 금동 사리외호에서도 볼 수 있는 요소다. 이를 근거로 이 사리병이 백제 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왕궁리오층석탑 금동제 불입상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기단부 주춧돌의 사리 구멍에 안치돼 있던 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9cm이고 광배를 포함하면 17.4cm이다. 육계가 크고 얼굴이 둥글며 귀가 길고 인중과 턱은 짧다. 머리와 눈썹에는 군청색 안료를 칠했다. 가슴이 넓게 파인 대의(大衣)를 통견(양 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으로 입었는데, 옷 주름은 사타구니에서 Y자로 갈라지며 양다리에서 U자 주름이 대칭을 이룬다. 시무외여원인(오른손을 들어 펴 보이고 왼손을 아래로 향하는,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불신과 대좌는 한 몸이고 광배는 따로 붙인 것이다. 8세기 전후에 유행한 이상화된 부처의 모습보다는 다소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에 만든 것으로 본다.


                         ▲왕궁리오층석탑 도금은제 금강경판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1층 지붕돌 윗면 사리구멍에서 발견된 세로 17.4cm, 가로 14.8cm 크기의 경판 19장이다. 각 장에는 17행×17자 형식에 맞춰 글씨가 새겨져 있고, 각 장 끝에 경첩을 달아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때 제작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고대 '금강경'과 글자 수 및 서체를 비교하여 백제 후기에 제작됐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은 부처와 제자 수보리가 나눈 대화로 구성된 경전으로, 집착하는 마음 없이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해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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