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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두 아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불꽃같은 삶을 살다’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0-05-05 22: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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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훈처, 5월의 독립운동가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선정


[박광준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삼부자(三父子)를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유찬희 선생은 1883년 8월 8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했고,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신덕(信德), 차녀는 신영(信永)이고 장자는 기석(基石), 차남은 기문(基文)이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보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했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에서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3년 북간도에서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 등에 참여해 한인의 식산흥업과 국적취득 등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한인을 계몽했다.


1919년 3월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로서 간도지역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했다.


또한 192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 대한국민회에서 무장투쟁과 자금을 지원했다.


1923년 12월에 중국 돈화현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의 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위암으로 1930년 귀국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했다. 


장남 유기석 선생은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아나키즘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의열투쟁을 촉구했다. 같은 해 6월 선생은 천진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 기관지 ‘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안창호의 유일정당 운동인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운동을 후원했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해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과 상하이지역 일본 책임자 곡정지(谷正之) 공사의 암살을 시도했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됐고, 1944~1945년 남경(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광복군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광복 후 중국 남통학원, 강소사범학원 등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1980년 별세했다.


차남 유기문 선생은 1931년 11월 무력 투쟁단체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참여해 의열투쟁에서 많은 역할을 했고, ‘천진(天津) 폭탄 의거’와 ‘육삼정(六三亭) 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선생은 1935년 5월에 흑색공포단원 엄순봉과 이규호와 함께 친일 상하이 거류민회장 이용로와 친일파 옥과빈을 처단한 사건에 참가했다. 이 사건에 선생은 체포되지 않아 소재불명(所在不明)으로 기소 중지됐고, 이후 선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정부에서는 세 분의 공훈을 기리어 유찬희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석 선생에게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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