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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338]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5-26 06: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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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서울 守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는 보물 제1580호이다. 아미타여래는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에 머물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부처를 말한다.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졌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로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둥글고 촘촘하게 말려 있다. 불상은 내의(內衣)를 입고 대의(大衣)를 양쪽 어깨에 걸쳤는데, 오른쪽 어깨 부분의 옷은 반달 모양으로 덮여 있다. 


왼쪽 어깨는 옷깃처럼 표현된 주름이 세 개 있고 촘촘하게 주름진 옷자락이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얼굴 표정과 신체에서 느껴지는 힘과 무게감, 옷을 이중으로 입은 점, 왼쪽 어깨의 주름,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게 처리된 승각기(僧脚崎)등이 특징적이다.

 

이는 13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할 수 있다. 불상의 내부에서는 36종 88점에 이르는 다양한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중수 발원문을 통해서 고려 공양왕 1년(1389)과 조선 명종 17년(1562) 두 차례에 걸쳐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한 것으로 밝혀져 불상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수국사는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1459년(세조 5) 그의 묘(후에 경릉(敬陵)으로 추존) 근처에 지은 왕실 원찰(願刹)이다. 창건 당시 명칭은 정인사(正因寺)였으나, 1471년(성종 2) 소혜왕후가 중창한 이후 수국사(守國寺)로 개명했고, 조선시대 동안 서오릉(西五陵: 창릉.경릉.명릉.익릉.홍릉)을 관리하고 왕실을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사찰로서 기능했다.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제작연대가 적힌 발원문이 없어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후한 얼굴과 건장한 형태미 그리고 이중으로 입은 착의법과 자연스러우면서 특징 있는 옷주름 등에서 13세기에서 14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이 유사하다. 


즉, 힘과 중후함이 느껴지는 얼굴과 신체는 물론 왼쪽 어깨에서 짧고 촘촘하게 흘러내린 주림이 좁은 겹 오메가(Ω)형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는 점과 금구 장식 없이 간결하게 처리된 승각기의 표현 등은 서산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1280년 중수), 서울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1274년경),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 13세기 중.후반 경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특히 이 불상에서 느껴지는 중량감 넘치는 건장한 남성적인 형태미는 고려후기 귀족풍의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추구했던 하나의 조류와는 또 다른 불교조각의 흐름과 미의식을 알려 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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