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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가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1-27 18: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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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한양도성 건설 당시 원래 이 자리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 흥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면서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 후손의 자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됐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됐다. 


당시 경운궁의 주위에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인 공사관 등이 둘러싸고 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들 포진돼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를 맞추어 돈덕전,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세우면서 경운궁의 전성기를 이룬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지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을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됐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 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갔다.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역의 3분의 1인 약 1만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한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처음부터 경운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경운궁의 본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 인화문을 철거했다. 그 결과 덕수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덕수궁의 정문이 됐다. 



건물의 명칭이었던 대안(大安)은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라는 뜻이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는데, 대안문 역시 피해를 입어 수리를 진행했다. 1906년에 수리를 완료했고, 이 과정에서 건물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당시 현판의 글씨는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자리에서 33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고, 덕수궁 궁역이 축소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했고,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축물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건립 당시에는 문 앞에 월대와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문의 기단과 계단은 훼손됐고, 2021년부터 대한문 앞 월대를 발굴 및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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