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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4] 미륵산 산기슭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3-30 08: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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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으로  창건 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나,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석탑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돼 수리가 완료됐다.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석탑 건립연대가 확인됐고,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탑이다. 익산 미륵사지에는 당간지주(보물), 연못,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등이 남아있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7세기에 미륵사가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으로 남아 있던 석재를 참고로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으로 창건 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나,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였고,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어 수리가 완료됐다.


남아 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 무게 약 1,830톤에 이른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됐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석탑의 1층 내부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돼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고,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탑이다.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석탑 건립연대가 확인됐다.






    ▲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가운데 가장 크며, 무왕(600~641)때에 지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3곳에 각각 탑과 법당, 회랑을 짓고, ‘미륵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로,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것이 확인돼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밝혔다.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가람절, 사찰 배치, 목조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 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인 사리장엄구, 유적연대를 적어 둔 사리봉영기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동안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백제 무왕과 결혼한 신라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리봉영기의 발견으로 미륵사의 석탑은 백제 귀족 가문 출신의 왕비가 세운 것이 확실해졌다. 미륵사를 세운 자가 누구인지, 무왕의 왕비는 누구인지, 새로운 문자기록의 등장으로 백제사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 동원 구층석탑


1974년 동원의 탑을 발굴해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됐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해 1992년에 완료했다. 


복원된 탑은 아래 기단이 한 변이 12.5m, 위 기단의 한 변이 10.5m 이중 기단이다. 탑 높이는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m이다. 탑의 지붕들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해, 석재 2,700여 톤을 사용했다. 석탑 복원기록과 사리를 담은 용기인 사리장엄을 5층 심주석에 모셔두었다. 


    미륵사 목탑 (발굴 중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탑은 모두 나무로 지었고, 특히 부여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처럼  목탑의 흔적의 절터가 많다. 같은 시기 신라 경주에도 진흥왕이 세운 황룡사의 9층 목탑 터가 남아있다.  이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공사를 총괄했고, 백제의 건축기술은 일본까지 알려져, 기술자는 일본의 첫 불교사찰 아스카데라 목탑(596년 완성)도 세웠다.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2기가 90여M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다.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깃대이다.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입구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두 지주는 양식수법에 의하여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주의 높이는 약 4.5m, 바깥면은 가장자리와 중앙에 띠가 있다. 지주의 안쪽은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있다. 지주 아래에는 기단이 있으며, 기단 각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못


불경에서는 극락세계에 칠보로 꾸민 연못이 있어 안에는 청정한 물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연못이 향내를 은은하게 뿜어낸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극락세계의 상징으로 연못을 만든다. 미륵사지입구에서 중앙으로 난 길의 양옆 연못 2곳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당간지주, 남회랑과 함께 만들었다.  동쪽의 연못의 너비는 동서 51m, 남북 48m이고, 서북연못은 동서 54.4m, 남북 41m이다. 두 연못 사이의 갈은 너비가 50.5m이고 남회랑 중앙계단까지 이어진다. 서북 연못가에서 미륵사 터를 바라보면 연못에 미륵산과 석탑이 비치는데,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미륵사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보물제1991호)/사진출처 문화재청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됐다.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찾기 어려운 독창적이고,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드러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사진출처 문화재청 


금제사리봉영기는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손바닥만한 크기에 두께 0.13cm, 금에 은(13.95wt%)을 조금 섞어 가공해서 각각 11줄 총 193자로 앞면에 99자, 뒷면에 94자 글씨로  미륵사를 세운 백제 왕비의 뜻을 얇은 금판에 새겨있다.


금제사리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해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돼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해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해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크다.


순금으로 만든 금제사리 내호는 청동 위헤 금박을 입힌 외호보다 훨씬 반짝거린다. 외호와 같은 모양이나 뚜껑이 열리지 않아 몸체를 돌려 열어야한다. 안에 가득찬 유리구슬 속에는 주둥이 지름이 0.41cm정도의 아주작은 유리병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서지고 둥근 마개만 확인된다. 


유리병 안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고, 순금내호, 순금외호로 이어지는 삼중의 용기로 감싼 뒤, 다시 석탑 심주석 사리공의 한가운데 모셨으니, 당시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부처님의 사리를 귀하게 여김을 알 수 있다./사진 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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